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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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살기로 고집하면(렘 42:15~17)

유앙겔리온 2025. 1. 16. 21:56

거기 살기로 고집하면
렘 42:15~17 

렘42:15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 
렘42:16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 
렘42:17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에 빠져 살면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자기 생각대로 했다가 범죄하였고, 롯의 아내도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심판 받았습니다. 사사 시대 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다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열왕기 시대의 악한 왕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기 "너희 유다의 남은 자"라 일컬음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유다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유다에 남겨두신 자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이라는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유다에 머물러 회복의 날을 기다리며 삶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이 교회의 회복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남겨두신 자들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두시며 맡기신 역활을 찾고, 남은 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머물러 살아가는 약속의 가나안 땅은, 인간적인 보장이 완전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신 땅을 말하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통치하시는 땅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땅이 풍년이 계속되는 곳이 아니였으며,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고 우환도 애통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그 땅에선 인생의 고통 슬픔 눈물 아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땅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애굽으로 가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만 같은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머물러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그 땅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가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유다백성들에게 시시 때때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습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망한 다음, 성전과 성벽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은 빈천한 이들 즉 "가난하고 천한 국민" 일부만을 유다 땅에 남겨, 그들로 하여금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유다의 남은 자가 살고 있는 그 땅에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들을 겪어내고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유다 땅에 거하는 것을 이제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일을 소망으로 품게 되었고 그것은 남은 유다인들의 고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시대에도 유다에 남은 자들의 생각이 어떠한 생각인지 이미 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것 또한 무엇 때문에 고집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가서 살고자 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여기 "고집하는"이란 히브리말의 뜻은 "너희 얼굴을 확정함"을 의미하는 말로써 각오, 결심 등을 가르킵니다.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고 거기 머물러 살기를 각오를했고 결심을 했으며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집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아니라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무시하게 됩니다.

  본문이 속한 예레미야 42장에만 '애굽'이란 단어가 7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은 인간의 깊은 죄의 뿌리입니다. 애굽은 죄에 물든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여 주실 본향을 버려두고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거듭난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셨는데, 그들은 도리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구원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백성들의 습관성 변덕인, "애굽으로 들어가 거기서 살기로 고집하는 일"을 도모하지 말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애굽으로 가려고 고집하는 백성들에게 단순히 그곳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만이 아니라 내려갈 경우 맞이하게 될 참혹한 결과까지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칼이 두려워 안전한 애굽으로 도망하려고 하지만 거기서 칼에 따라 잡히고, 가나안 땅에서 온갖 질병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지만 그 질병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며, 가나안 땅에서 굶주림이 두려워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거기까지 따라 미친 굶주림과 함께 살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라가서, 급히 따라가서"라는 말씀이 거듭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따라 미치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뒤에 딱 달라붙어서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칼과 질병과 굶주림을 따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돌린다고 따돌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벨론의 칼이 아닙니다. 질병이나 굶주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애굽에 살기로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이며,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우상에 빠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은 결코 피난처가 아니라 도리어 '무덤'이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여히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 머물기를 고집했던 유다백성들은 애굽에 내려가서 우상 숭배에 빠졌고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주 그곳에서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선택은 재난으로 빨리 뛰어드는 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해 보이는 땅이 아니라 너희 본토인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이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산하지 말고, 머리 굴리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청종해서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의 유다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모든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