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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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픕니다(삼하 18:33)

유앙겔리온 2024. 12. 26. 11:58

대림절 둘째주일

사랑은 아픕니다.
삼하 18:33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이 나타낸 반응입니다.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은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아들 가운데 셋째입니다. 압살롬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압'과 평화를 뜻하는 '샬롬'을 합쳐 '평화이신 아버지' 곧 다윗을 이릅니다.

  그런데 그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그의 이복형제요 왕위 서열 경쟁자인 암논을 살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서 그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백주에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아버지의 후궁들과 왕궁 옥상에서 동침하여 아버지에게 치욕을 안겨주었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가는 아버지와 그의 백성을 죽이고자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 압살롬이 잘못될까봐 다윗은 노심초사합니다. 다윗은 장군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 부탁까지 합니다. 전쟁이 극에 달할 때 그에게 보고하러 들어오는 신하들이 가지고 오는 소식을 두려움으로 살피게 됩니다. 제발 압살롬이 죽지 않고 차라리 멀리 도망갔다는 소식이 왔으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타고 있던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아래로 달려가다 어이없게 압살롬의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그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되자 요압이 압살롬을 처참히 죽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버지 다윗은 이 일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 아들이 평안하더냐고 묻습니다. 다윗에게 보고된 압살롬의 소식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받아든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파'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라가즈"인데 그 뜻은 '떨다' '전율하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 왕의 체면도 버리고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마음이 심히 아파서"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로 기뻐해야 할 순간에 기뻐하지 못하고, 잔칫집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은 다윗 때문에 초상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아들이 아니고 원수요 적이었다면 압살롬의 죽음은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못된 짓을 아무리 했어도 다윗에게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기에 그 소식은 너무도 비통한 소식일 뿐입니다. 자식이 그 살아가는 땅에서 잘 되길 바라지 않는 인간은 다윗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전쟁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아들과 전쟁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을 것이며, 아들이 죽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되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뉘우치고 아들로 되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다윗의 마음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은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비극의 시작점은 자신의 죄로부터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을 깨닫고 더욱더 슬퍼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만 다윗은 아들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용서할 기회마져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이전에 순간의 만족을 위해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는 일로 말미암아서 촉발된 다윗 가정의 얽힌 가정사, 그 애정사가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마음을 오늘 본문에 이렇게 애절하게 기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시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픕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하며 아픈 이유가 사랑하면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기 소유를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소중하게 지켜왔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려면, 거짓자아를 찍어버려야 하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의식의 틀을 깨뜨리고 바궈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픈 겁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 사랑은 더 아픕니다. 

  누가 더 아픕니까? 그것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픕니다. 더욱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것은 결국 더 자기를 더 많이 파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아픔.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마음 아픕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픕니다. 성육신은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자기 중심성을 버리시고 아기 예수로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오셨으며, 섬기려오셨고, 죽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을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아파할 필요가 없으실텐데, 아들을 주시기 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이 나타낸 반응입니다.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은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아들 가운데 셋째입니다. 압살롬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압'과 평화를 뜻하는 '샬롬'을 합쳐 '평화이신 아버지' 곧 다윗을 이릅니다.

  그런데 그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그의 이복형제요 왕위 서열 경쟁자인 암논을 살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서 그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백주에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아버지의 후궁들과 왕궁 옥상에서 동침하여 아버지에게 치욕을 안겨주었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가는 아버지와 그의 백성을 죽이고자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아들 압살롬이 잘못될까봐 다윗은 노심초사합니다. 다윗은 장군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달라 부탁까지 합니다. 전쟁이 극에 달할 때 그에게 보고하러 들어오는 신하들이 가지고 오는 소식을 두려움으로 살피게 됩니다. 제발 압살롬이 죽지 않고 차라리 멀리 도망갔다는 소식이 왔으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타고 있던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아래로 달려가다 어이없게 압살롬의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그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되자 요압이 압살롬을 처참히 죽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버지 다윗은 이 일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 아들이 평안하더냐고 묻습니다. 다윗에게 보고된 압살롬의 소식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받아든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파'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라가즈"인데 그 뜻은 '떨다' '전율하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 왕의 체면도 버리고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마음이 심히 아파서"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로 기뻐해야 할 순간에 기뻐하지 못하고, 잔칫집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은 다윗 때문에 초상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아들이 아니고 원수요 적이었다면 압살롬의 죽음은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못된 짓을 아무리 했어도 다윗에게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기에 그 소식은 너무도 비통한 소식일 뿐입니다. 자식이 그 살아가는 땅에서 잘 되길 바라지 않는 인간은 다윗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없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전쟁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아들과 전쟁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을 것이며, 아들이 죽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되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뉘우치고 아들로 되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다윗의 마음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은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비극의 시작점은 자신의 죄로부터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이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을 깨닫고 더욱더 슬퍼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만 다윗은 아들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용서할 기회마져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이전에 순간의 만족을 위해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는 일로 말미암아서 촉발된 다윗 가정의 얽힌 가정사, 그 애정사가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마음을 오늘 본문에 이렇게 애절하게 기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시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픕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하며 아픈 이유가 사랑하면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기 소유를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소중하게 지켜왔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려면, 거짓자아를 찍어버려야 하고,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의식의 틀을 깨뜨리고 바궈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픈 겁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 사랑은 더 아픕니다. 

  누가 더 아픕니까? 그것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픕니다. 더욱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것은 결국 더 자기를 더 많이 파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아픔.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마음 아픕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픕니다. 성육신은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자기 중심성을 버리시고 아기 예수로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오셨으며, 섬기려오셨고, 죽으러 오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을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아파할 필요가 없으실텐데, 아들을 주시기 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