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준비하고 있으라(마 24:44-51) 본문

카테고리 없음

준비하고 있으라(마 24:44-51)

유앙겔리온 2024. 12. 26. 11:51

대강절 첫번째주일 

준비하고 있으라
마 24:44-51 

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마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은 대강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교회력으로는 신년이 되며, 따라서 대강절 첫째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셈입니다. 대강절(Advent)이란 뜻은 "오심, 방문, 도착한다"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약속 장소에서,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식구들이나 손님을 도착하기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처음부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강절 때뿐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항상 그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잘 기다리며 사는 가가 곧 신앙생활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오늘 주신 본문말씀은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잘 기다리는가를 주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에게 직접 말씀해주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철저하게 예수님 당시에 풍습을 담고 있는 이야기 소재입니다. 당시 주인이 먼 길을 떠나게 되면 가장 믿을 만한 종을 골라서 자신의 가족들과 재산,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그 종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할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 속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첫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5절 중반에 보시면,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라고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그만큼 주인으로서는 자신이 떠난 상태에서 집안팍의 모든 일을 맡길 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쉽지 않는 결정입니다. 

  여기서 '그 집 사람들' 은 주인의 가족들을 가리킵니다. 주인의 아내나 자녀들 그리고 주인의 수하의 여러 종들까지, 주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때를 따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이 충성스런 종의 사명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 라고 말씀합니다. '때를 따라'… 끼니를 거르지 말고, 하루에 세 번 정한 시간에 맞춰 음식을 장만해 내야 하는 직분이, 당시의 종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좋을때도 있지만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몸이 컨디션이 괜찬을 때도 있지만 아플 때도 있습니다. 계속하던 종노릇을 한 번쯤 거르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실하고 충성된 종이라면 그 맡은 일과 그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고 "때를 따라" 그것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서기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로마제국 이탈리아 본토 남부,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했습니다. 그로인해서 순식간에 폼페이를 삼켜버렸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10만배 강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 폭발이었다고 합니다. 도시는 3m 높이의 화산재에 뒤덮였습니다. 

  그 후 역사 속에 잊혔던 폼페이는 한 농부의 호기심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됐습니다. 대대적으로 이뤄진 발굴 탐사. 이 가운데 인류를 감동시킨 화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과 자세로 서 있는 "보초병의 화석"이었습니다. 무서운 화산재 불이 날아와 살길을 찾아 도망가는 상황에서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처럼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은 없었을까요? 우리는 이 화석을 통하여 죽는 순간까지 의연히 임무를 다하고 있는 초병의 '충성심'을 보게 됩니다.? 

  대강절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은 바로 이 폼페이의 초병초럼, 오늘 본문의 "신실하고 충성된 종"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고 때를 거르지 않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종은 "매우 악한 종"입니다. 

  이 악한 종은 주인이 주인의 자리에서 시시때때로 살필 때에는 신실한 종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신실한척했습니다. 그러했으니까 다른 종을 다 제치고 주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주인을 대리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리하게 되었을 때, 이 악한 종은 48~49절 보면,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자"가 된 것입니다. 

  이 "신실하지 못한 악한 종"은 주인이 보는 앞에서는 천사와 같았지만 주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괴물로 변했습니다. 이 악한 종은 눈가림의 명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눈가림으로"(엡 6:6)하지 말고 주인이 있든 없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성실해야 합니다. 

  이 악한 종, 신실하지 못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사고방식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는 주인 노릇에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흥미진진한 삶의 재미였습니다. 종이란 아무리 큰 일을 맡아 하더라도 변함없이 종일뿐만 아니라, 주인이 빨리오고 늦게 오고 주인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종으로서의 자기 신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신분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야사에 있는 대로 정승 태운 당나귀가 많은 사람들이 정승에게 절을 하자 당나귀인 자기보고 절을 하는 줄 알고 꾸벅 꾸벅 인사를 받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저 어디까지나 당나귀는 당나귀일 뿐 정승을 태웠다하여 건방지게 정승 행세를 하거나 정승에게 하는 절을 받아서 대신 답례를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은 어느 순간이든지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자기 위치, 자기 신분을 꼭 지킬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곧 충성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관은 돌고 도는 '윤회(輪回)'가 아니라 시작과 과정이 있으며, 심판과 구원으로 종결되는 끝이 있는 역사관입니다. 

  오늘 본문 46~47절과 50~51절 말씀에 보면 충성된 종과 같이 잘 기다린 자는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종처럼 잘못된 기다림에 빠진 자에 대해서는 50~51절에서도 보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하셨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설렘과 기대로 손꼽아 기다리는 것, 모든 기다림의 우선순위와 초점을 주님의 '다시 오심'에 맞추고, 그분이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림 절기에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을 가다리는 일에 합당한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잘 기다리는 연습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오실 주님과 함께 그 영원하고 아름다운 그 나라의 주인공들이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