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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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뗀 아이같이(시 131:1~3)

유앙겔리온 2024. 11. 29. 13:46

젖 뗀 아이같이
시 131:1~3 

시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이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젖 뗀 아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인생을 두 가지의 단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아기가 젖을 뗀 단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지금이 "젖뗀 아이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윗은 자신을 "젖 먹고 있는 아이"가 아닌 "젖 뗀 아이"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까요? 

  젖을 물고 있는 시절의 아기는 오직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본능적인 욕구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젖을 물고 있는 아이는 젖을 먹지 못하면 떼를 쓰고 서럽게 통곡합니다. 이것을 빼앗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울어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녀에게 조종당합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잘도 압니다. 

신앙생활에도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조종하고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처럼 살려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이런 원초적인 욕구와 불만족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 의해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젖을 먹지 않아도 엄마가 좋은 것처럼 하나님만으로도 만족하는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젖을 떼는 자리, 젖을 떼는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나아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예시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 받은 이유가 많았겠지만 다윗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은 "젖 뗀 아이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이유입니다. 

  다윗시대에 가정에서 아이와 엄마 사이에, 그리고 온 가족 사이에 아이의 젖을 떼는 과정은 초미의 관심거리였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젖을 떼는 때는 서너 살입니다. 서너 살이 되기까지는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투쟁적으로 젖을 찾고 젖을 먹습니다. 그리고 젖을 떼고 밥을 먹을 정도가 되었을 때, 젖 떼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젖을 떼는 과정이 쉬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는 계속 울며 젖 달라고 조르고, 아무 낙이 없는 존재처럼 젖만 찾고 불안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젖을 먹고 있는 아이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할테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아이에게 젖을 떼기 위해서 옛 엄마들은 쓴쑥과 같은 것을 가슴에 발라서 아이가 젖을 떼도록 하기도 하고, 젖보다 맛이 있는 것을 먹이거나 길들여서 젖을 떼기도 합니다. 온 가족이 이 일에 협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해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젖을 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를 벗어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려면 젖은 합당한 양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젖을 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말'입니다. 이것이 명사로 쓰이면 "낙타"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좀 황당합니다. '젖을 뗀다'는 말과 '낙타'란 말이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한 단어에서 유래한다면 젖을 떼는 것과 낙타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낙타라는 동물은 사막 생존을 위해서 특화된 동물입니다. 낙타는 물을 마시지 않고도 보름을 버팁니다. 이런 이유로 낙타는 험악한 사막을 여행할 때도 물을 마시지 않고 "생존하고 자립"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로부터 젖을 뗐다고 하는 것은 사막의 낙타처럼 생존하고 자립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창 21:8절에 "이삭이 젖을 뗄 때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는데, 이 때 "젖을 뗐다"는 말이 바로 '가말'이었습니다. 더 이상 젖을 주지 않고 밥을 먹이는 것입니다. 

  젖을 뗀 아이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도 젖을 찾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도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배우는 것이 젖 떼는 것입니다. 젖을 떼면서, 아무리 좋아해도 떼어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젖을 밀쳐내고 싫어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젖을 뗀 상태이지만 고요하고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한 때는 "마음이 교만할 때도 있었고, 눈이 오만할 때도 있었으며,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젖 뗀 아이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젖 뗀 아아와 같이 된 이제는 1절에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했고, 그리고 3절에서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여전히 가슴에 무엇인가 얹혀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무거우십니까? 

  그 이유가 "젖 먹는 아이의 단계"에 놓여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싫고 힘이 들어도 "젖 뗀 아이의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과 같은 신앙인생이 될 때, 그때 우리에게 참 평안과 만족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가르쳐 주시고,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즐겁게 찬양하고 감사하며 할 일도 깨닫게 해주시며 할 일을 감당하게도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