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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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분발하여(사 64:5~7)

유앙겔리온 2024. 11. 5. 15:27

스스로 분발하여
사 64:5~7 

사64: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사64: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유다에 드리운 좋지 못한 "오래된 현상" 하나를 끄집어 내셔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아주 기쁘시게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 백성들에게 선대함 대신에 진노하시고, 주께서 그 얼굴을 그 백성들에게 숨기시며, 그들을 소멸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이런 현상이 하루아침에 잠깐 생긴 일이 아니라 "이 현상이 이미 오래되었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병은 오래되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죄악된 삶에 이미 오래 길들여져 버린 것입니다. 살 소망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언어화되고, 사고방식이 되고, 습관이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관계들만 남았고 이런 현상이 오래되었습니다. 

  이 "오래된 현상"의 병폐가 무엇입니까? 

6절에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했습니다. 

  마치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전혀 그 사실을 알지도, 받아 들이지도 않는 것처럼, 바람이 시들고 말라 떨어진 잎사귀를 몰아가는 것처럼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현상에 놓이다보면, 내 삶에 만족이 없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공허하며 허무한 삶이 반복됩니다. 영적 침체와 영적 무능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늪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자신의 탓만 같아서 기도 드리는 용기조차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됩니다. 

  이미 오래된 현상에 빠져있다보면, 신앙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무덤덤한 인생을 살고 감동없는 삶을 살고 있어도 화들짝 놀라지도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처럼 오래된 현상이다 보면 습관이되고 운명이 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이 오래된 현상이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나쁜 것이 오래된 현상으로 지속되다 보면 그 병폐가 크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의 오래된 병폐는 나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탈출구가 무엇입니까?

  탈출구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분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더기와 같은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고 붙잡는 일을 스스로 분발해서 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옷으로 거듭난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력을 잃은 죽은 낙엽을, 죄의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인생에서 분발하여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스스로 분발하여"는 히브리어로 "우르"인데 "깨다, 눈뜨다, 일어나다, 자극하다, 충동하다, 흥분하다, 스스로 일어나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스스로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오랫 동안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 그러고 사는데" 하면서 분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에서 "붙잡다"는 히브리어로 "하자크"인데 "단단히 매다, 꽁꽁묶다, 달라붙다, 집착하다, 꽉잡다, 꼭 붙잡다"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하여 "스스로 주님을 붙잡는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상황을 본문 말씀을 통해서 토로합니다. 스스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스스로 주를 붙잡는 자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중보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찾고 주를 붙잡는 자가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식솔들을 데리고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가고 있을 때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야곱을  대면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때에, 그가 한일은 얍봅강가에서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형 에서와 그 군대는 무서워할 대상이 아니라 적어도 형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여자의 이름으로 성경에 올라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페르시아 왕인 아하수에로의 총애를 받고 있던 당시의 권력자 하만에 의해서 유다민족이 미움을 받아 그들의 멸망이 눈 앞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에 끌려와 있던 유다사람이였던, 삼촌 모르드개와 조카 에스더가 자신들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서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면서 스스로 분발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 역할들을 감당했을 때 슬픔의 날이 변하여 기쁨의 날로 바뀌어졌던 유명한 일이 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 교회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어느덧 구원은 따논당상이라는 안일하고 그릇된 생각에 나태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만약에 그런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고 빠져있다면 이제 돌이키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를 단단히 붙잡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을 찾고, 붙잡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붙잡는 기도를 했던 청교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말하길 "청교도들의 기도는 영혼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이 열심 있는 기도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방종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염치 없어도 스스로 분발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붙잡아야 합니다. 스스로 분발하면 하나님이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