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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엡 6:15)

유앙겔리온 2024. 9. 19. 16:07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엡 6:15 

엡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단순히 "유희하는 곳"이 아니라 치열한 영적 각축장이고 영적 전투장이라는 영적 깨달음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곳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사단의 공격에 패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승리하려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전신갑주를 입고 그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현대전의 양상은 전통적인 전쟁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현대전는 누워서, 앉아서, 신을 벗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통적인 전쟁은 누워서 하거나 앉아서 할 수 없습니다. 신을 벗고하는 전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전통적인 전쟁은 "그런즉 서서"라는 기본적인 자세를 언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서하고 걷고 뛰고 달리면서 해야 합니다. 견고히 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잘 걷고 뛰고 달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발이 건강해야 하고 발이 상하지 않도록 잘 보호되어야 합니다. 

  군인의 발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은 고사하고 다른 병사의 신세를 지게 되는 짐덩어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 "신어야 할 신발"에 관한 말씀입니다.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걸음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신발만 보아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신발을 신고 나서는 사람을 보면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신발은 일반적인 신발이 아니라 군사가 신은 군화입니다. 영적전쟁을 위해서 신어야 할 군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시대에 모든 길들은 지금처럼 포장된 좋은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흙길이고 자갈 길이었습니다. 더욱이 병사가 가는 길은 시민들이 그냥 걸어가는 그런 평화로운 길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험산 준령을 넘고 가시밭을 헤처지나가야 하며 적을 쫓기도 하고 적에게 쫓김을 당하기도 합니다. 병사들이 발이 불편하거나 신발이 불편하면 전투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군인은 육중한 군화를 신습니다. 군화는 보기에는 그렇게 육중한데 군화를 신으면 발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군인은 그 신발만 신으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돌짝밭, 가시밭, 산길, 들길, 광야와 사막지대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도 발이 보호됩니다. 병사는 전투화를 신고 산도, 계곡도, 강도, 사막도, 정글도 달려야 합니다.

  평안의 신발
  신은 편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고급스러움이나 멋스러운 것이 우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신발만큼은 그런것이 별 소용이 없습니다. 편함이 우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영적 병사가 신어야 할 전투화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병사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전쟁이란 상황 자체를 두려워하고, 적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무서운 적인 것입니다. 적을 두려워해서는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먼저 정신으로 적을 제압해야만 육체적으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전쟁에 나갈 군사를 모집할 때에, 전쟁에 적합지 않아서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할 대상자 중에 첫번째가 "전쟁을 두려워 하는 자"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사시대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이스라엘을 치려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일으켜 그들과 싸우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게 했습니다. 

  기드온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여든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는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수가 너무 많다고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에서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하자 22,000명이 돌아갔습니다 (삿7:2-3). 두려워 하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 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한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한 복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단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열정을 무력화시킵니다. 모든 능력과 은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원수들이 강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6:33에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하는 담대함을 가졌습니다(삼상17:45). 우리도 이러한 담대함을 가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다주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도록 해야 합니다. 불안이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걱정 근심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준비한 신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준비한 것(예비한 것)"이라 번역된 '헤토이마시아'는 신약에서 다른 용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어(명사)로 우리말 성경에서는 준비(개역), 예비(한글), 갖추어(공동), 차비(새 번역)로 번역되었습니다. 

  신발은 미리 신어봐야 합니다. 신발의 크기는 적당한가? 신발이 안정되고 균형잡혀 있는가? 왼짝과 오른 짝이 같은 것인가? 그리고 적당하게 길이 나서 이 신발을 신고 오래 달릴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미리서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아끼다가 오랜만에 신고 나선 신발이 문제를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 신발이 문제를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저는 기분 좋게 새 신발을 신고 외출을 했다가 고생한 적이 몇번 있습니다. 발뒤꿈치가 벗겨셔서 진물이 나고 쓰려서 힘들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구두를 전문으로 수선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축구화나 가죽구두 같은 것은 처음 나온대로 신고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수리해서 신을 때가 가장 신기에 편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발에 가장 안정된 신발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자신의 발에 맞도록 예비된 신발, 준비된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모든 장구, 모든 장비는 다 자신에게 익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으면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대적할 때, 입혀준 사울 왕의 갑옷과 칼을 벗어던져버리고, 물매에 물맷돌을 준비해서 나가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신어야할 신발
  성경에서 말하는 '발'은 우리의 '걸음'을 상징하고, 그 걸음을 돕는 것이 신발입니다. 

  신발은 신기 위함입니다. 장식품이 아닙니다. 또한 신발은 신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발은 걸음을 위한 것입니다. 신발은 고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동을 위한 것, 변화를 일구워내기 위한 것입니다. 신발은 신고 걷기 위해서요 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해야 할 내용도 확정되었습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어찌 불안을 전할 수 있으며 불평을 전할 수 있으며 다툼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요, 평화의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을 이용해서 불화를 조장하고 복음을 이용해서 싸움을 일삼고 복음을 핑계 삼아서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인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