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엡 6:14a) 본문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엡 6:14a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신학적으로 지상에 있는 지역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하고, 천국의 교회를 승리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지상의 지역교회는 아직도 여전히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교회이고, 천국의 교회는 이미 전투는 끝나고 승리를 누리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지상의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지역교회에 속하여 있는 우리 자신들은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 병사로 서 있다는 것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은 그 자신을 하나님과 맞설 존재로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통해 교회와 성도를 무참히 공격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활한 사단의 역사 가운데 우리 성도는 한시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강건케 되고 무장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먹잇감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마네킹에게 입히고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안 됩니다. 전신갑주는 우리가 우리의 몸에 입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투를 위해서 주의 깊게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투적인 지상에 있는 지역교회를 섬기면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성도들은 전투복인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고 전투적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첫번째 전신갑주로의 무장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그런즉 서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띠"는 것입니다.
1, “그런즉 서서”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때 가장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런즉 서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어서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한다면 당연히 서서 옷을 입습니다.
전신갑주를 착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굳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서지 않고서는 전신갑주를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서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신앙이 갓난아이처럼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서서”라는 말씀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너희 허리 띠를 띠라”
성서시대에 군인을 포함한 남자와 여자 모두는 길고 폭이 넓은 늘어지는 겉옷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이것을 밤에는 이불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니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풀거리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므로 이대로 전투에 나간다면 옷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우선하여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시대에는 사람들이 무슨 활동을 하려면 우선 긴옷과 치맛단을 걷어올려 허리에 띠로 그 끝을 묶어서 활동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타인의 허리 띠가 아니라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자꾸 남의 허리를 띠를 띠고, 묶으려고 합니다만 자신의 허리 띠를 띠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띠”는 제사장의 봉사의 도구이고, 순례자의 힘의 원천이고, 용사들의 힘이 머문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어떤 것들을 먼저 걷어올려 허리에 묶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띠를 띠는 것은 준비를 갖추는 자세입니다. 동원될 태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띰으로 움직임을 기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진군할 수 있는 복장에는 허리띠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진군나팔을 불어도 허리띠를 풀어놓고 있다는 것은 직무와 전쟁에 나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 제일 먼저 허리입니까?
우리의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들이 있습니다. 손과 발과 다리와 머리 등등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진리로 허리 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전투하는 병사에게 있어서는 신체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허리이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허리에 단단한 벨트를 매고 훈련에 임하거나 전쟁에 임하는 것을 보고 착안한 말씀입니다.
어떤 동물은 힘이 입과 꼬리에 있으며, 어떤 동물은 코나 발에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동물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힘이 되는 것을 감추고 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적인 우리 성도의 강한 힘은 마음의 허리에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허리가 중심인 것처럼 한 인간을 중심으로 보면 마음이 그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 중심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신뢰하십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했습니다.
3, “진리로”
그런데 허리를 띠를 띠는데 반드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진리’, ‘알레데이아‘는 “가려져 있지 않음, 숨김이 없는, 위조되지 않음”,이란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남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진리가 기초여야 합니다.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신앙생활은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단은 그것부터 알아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진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만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근거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그것은 무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셨으니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는 복음입니다. 이 진리는 구원의 진리요 은혜의 진리요, 영생의 진리입니다. 진리로 중심을 삼을 때 진리가 아닌 것은 우리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진리라는 말은 "사실, 정직, 진실, 참된, 성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사실, 정직, 진실, 참됨, 성실함으로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 정직하지 못한 것, 참된 것이 아닌 것, 불성실한 것 등은 언젠가는 자기 자신에게 해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세력과 한판 전쟁을 치루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는 것입니다.
정말로 신앙에 뜻이 있으면 진리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것이 아무리 주변에서 펄럭거려도 거기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