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삼가지 아니하면(잠 11:22) 본문
삼가지 아니하면
잠 11:22
잠11: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주얼의 시대입니다. 일단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예뻐야 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시선을 끌 수 있고, 그러면 어디서나 찬사와 각광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요구에 맞춰 자신의 외모를 가꾸려고 합니다. 그래서 화장술이 발달했고 심지어 성형술은 새로운 시대의 단장의 코드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외모의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라도 예쁘고 아름다우면 이 세상 살아가는데 상당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 모두 외모를 가꾸는 일은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또 외모를 가꾸지 않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것이 꼭 선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꼭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엔 아름답고도 악한 것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 뒤에 숨어서 사악한 일을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속아 넘어가서 패가망신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가치를 드러내고 그 아름다움을 신뢰하고 찬사를 보내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함은 돼지 코에 금 고리처럼 격에 맞지 아니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를 가르킬까요? 여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어도 그렇고, 영어성경들도 동일하게 ‘금고리를 단 돼지코’가 문장 앞에 나옵니다. 이 말은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분별없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무용지물이 되고만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 아름다운 여인은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재능, 장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재능과 장점들도 삼가지 아니하면 돼지코에 금 고리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재능 때문에 장점 떄문에 교만해지고 오만방자해지고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을 서슴치 않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본문의 ‘아름다운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 주님의 신부된 교회를 가르킵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자신을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을 잘 관리하면 아름다운 코에 금고리를 더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그것을 바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란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서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면 그 아름다운 이름이 돼지 코에 금 고리한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돼지코’는 추함을 상징하고, ‘금 고리’는 아름답고 귀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코에 금고리를 하는 것은 부조화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과 금 고리’는 금상첨화라면 ‘돼지 코와 금 고리’는 설상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여인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더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비결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삼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삼가하다’라는 말은 히, ‘타암’인데, ‘미각, 맛’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조금 찍어 먹어보는 것’, ‘맛을 시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맛을 분별하고 맛을 시험합니까? 맛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맛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분별하다, 판단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삼가함은 맛과 멋을 지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삼가지 아니하는 것” 히, ‘쑤르 타암’은 “맛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삼가지 않으면 결국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지 않는 사람은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금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가 반쪽짜리로 치러졌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여히 그렇게 강행하는 양측 모두다 국민들의 마음에 기쁨과 희망을 안겨다주는 대신에 도리어 실망과 상실감만을 안겨다주었습니다.
그런데 8월 달에는 8월 15일에 광복절이 있고, 8월 29일에 국치일이 겹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날이 1910년 8월 29일 입니다. 그래서 '국치일' 이라고 부릅니다.
광복절과 국치일이 같은 달에 겹쳐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삼가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광복절'이 오는 것이고, 불순종하고 서로 다투고 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국치일'을 겪게 됩니다.
힘이 있을 때, 기회가 주어질 때, 삼가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삼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삼가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삼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대립하고 대결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수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아름다움과 삼감은 하나로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삼가는데 있습니다.
삼가하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합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삼가해야 합니다.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네 장점과 재능을 알고 겸손히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점에 노출되지 않도록 항상 살펴야 합니다.
삼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도의 아름다움과 교회의 아름다움도 유지됩니다.
혹시 내 장점과 내 재능,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하는 일들이 돼지코에 금고리는 아닙니까?
내 장점, 내 재능, 내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채권이 아니라 채무라고 생각하면서 삼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별력 있게, 신중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