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15) 본문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서 4:14~15
빌4: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립보교회는 “참여”가 넘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14과 15절에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했고,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이렇게 두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방관자들이 아니었고 구경꾼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바울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우리도 참여의 정신과 참여의 실천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의 참여가 어떤 것이였으며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괴로움에 함께 참여 했습니다.
14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괴로움’은 ‘쓸립세이’라고 하는데 신약 성경에 45회 사용되었고, 주로 ‘환난’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쓸립세이’는 ‘고통, 재난, 괴롭힘, 환난, 핍박’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로, 상당히 고통스럽고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큰 재난이나 환난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원치 않게도 감옥에 있으면서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우리가 지금 당하는 괴로움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만 괴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빌립보 교회가 그 괴로움에 함께 참여해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그런가 보다 하며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어려운 중에 도움을 주며 바울의 짐을 나누어 졌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지체가 고난을 묵묵히 이겨 내는 삶을 좋아합니다. 그러한 모습에 박수를 쳐 줍니다. 그러나 지체라면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함께 어려움을 져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영적 가족입니다. 공동체나 가족은 연약한 사람을 돌보게 되어 있고 아품을 함께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같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좋은 때 함께 좋아해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아파하는 사람을 볼 때 함께 아파해주고 괴로울 때 함께 괴로워해 주는 것도 사랑인 것입니다.
신앙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나와 아품에 함께 참여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 홀로 겪는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고난과 괴로움을 기꺼이 함께 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수월하게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 당할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무관심하는 것은 절대로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 다 빼앗기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이웃인게지요.
2, 복음의 시초에,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을 때에 참여 했습니다.
15절에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의 복음 사역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교회가 있었으나 바울이 갇힌 것 때문에 동역하던 사람들과 교회들이 바울은 떠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오직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만이 바울의 사역에 끝까지 참여해 주었습니다.
딤후4:6-12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는 여전히 바울과 함께 합니다. 빌립보교회가 특별히 가진 것이 많고 넉넉해서가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눈 것입니다.
3, 잘하였도다
바울 사도는 이처럼 빌립보교회가 자신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해준 것과 자신의 복음의 시초에,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을 때에 참여해 준 것, 이것을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합니다.
여기, ‘잘하였도다’ (칼로스)는 ‘아름답게, 멋지게, 선하게, 휼륭하게’라는 뜻입니다. 이 ‘칼로스’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빛을 비롯한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에 만족하고 기뻐서 말씀하신 ‘좋았더라’는 말씀, 즉 히브리어 “토브”와 같은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와 같은 ‘칼로스’를 사용해서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참여해주었고, 아무도 참여하주는 이들이 없을 때 참여해준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있을 때 그의 고통을 그냥 멀리서만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모금운동을 활발히 하여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그것을 바울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바울을 돌보도록 했던 고마운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것을 바울사도는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주의 일, 복음사역은 누구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무엇보다도 “잘하였도다”라고 칭찬 받을 일인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