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여호와께 감사하라(시 118:1~7) 본문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18:1~7
시118: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18: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시118:3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시118:4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시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 백성들이 해야 할 것들 중에 "항상 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가 다루게 될,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민족적)" "아론의 집도(가문, 문중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도(개개인적)"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아론의 집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도" 이 감사에서 모든 신앙적 행위가 나와야 하고 삶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신앙 행위와 삶의 정황들은 이 '감사'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탈이 나지 않습니다. 감사없이, 자발성 없이, 억지로 하다보면 지치고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할 곳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모든 예배도 봉사도 그 어떤 섬김과 선행도 이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의 의로 하고 자기 자랑으로 하고, 자기 만족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무익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여호와께 감사할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했습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거듭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바른 신 이해와 바른 신 인식을 가진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발견함으로 인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헷세드"라고 합니다. 이 헷세드란 말은 "자비"(Mercy), "친절"(kindness), "자애"(loving-kindness), "선함"(goodness), "친절함"(kindly), "자비로움"merciful), "호의"(favor)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인자하신 성품을 알면 그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우리가 하나님께 달리 드릴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벅찬 세상적인 기쁨도 얼마나 쉬 사라지고 맙니까? 심지어 세상 그 자체도 낡아서 쇠해지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이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 인자하심에서 나온 싹과 꽃과 열매가 바로 감사입니다.
2, 우리가 감사 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고통'을 혹자는 "좁은 골짜기"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좁은 골짜기와 넓은 곳"을 대조시켜주고 있습니다.
숨이 막히는 좁은 골짜기에 갇혀 있을 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 억압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부르짖으면 그 고통을 다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넓은 곳으로 끌어올려 숨을 쉬게 하시며 자유케 하셨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넓은 곳"은 갇히지 않는 넓은 장소, 곧 자유로움이 있는 곳입니다. 숨이 막히고 짓눌린 그 좁은 곳과 같은 이런 상황에서 건지셔서 넓은 곳으로 인도해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아찔한 협곡에서 벗어나 물이 풍족한 기쁨의 넓은 평원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는 당연지사인 것이지요.
3, 우리가 감사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내편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6,7절에 보면 연속해서 "여호와는 내 편"이라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는 나를 위하신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편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만만치 않는 세상에 내 편 하나쯤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살만한 세상이 되고, 사는데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내편 되어준다고 해도 큰 위로가 될터인데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했습니다. 사람이 내편 되어주는 것이 때로는 더욱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어떤 고난과 환난을 당하더라도 "내가 두려움이 없나니"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신다면 세상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사방에 욱여쌈을 당해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믿음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천군천사들을 보내사 우리를 위해서 싸우게 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그 싸움에 뛰어드신다는 것은 그 얼마나 위로가 되는 사실입니까?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도" "아론의 집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도" 매번 "이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항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주신 말씀에 귀기울이고, 스스로에게 불평을 멈추고, "여호와께서 인자하심, 하나님이 넓은 곳에 세워주심,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심"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