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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유앙겔리온 2024. 7. 3. 11:1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빌 4:5 

빌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초대교회시대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힘과 용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관용으로 여겨지는 온유나 용서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백해무익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비정한 시대에서 바울사도는 가장 인기 없는 메시지를 빌립보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주님의 교회는 로마제국과는 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나라는 세상나라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초대교회 시대뿐 아니라 요즈음 사람들에게서도 점점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관용”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 가져야 할 삶의 자세나 품성이 “관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제가 전하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제목의 말씀도 인기없는 메시지 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바울사도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 '관용' “에피에이케스”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양보하다. 점잖다. 합리적이다. 관대하다. 온건하다. 참을성 있다.” 등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당성, 마땅히 행할 것, 그것은 누구나 사회인으로 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베푸는 것이 '관용'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 너무 지나치게 시시비비를 가르고 까칠하게 반응하고 크게 화를 냅니다. 관용은 시시비비만을 가르는 것이 아니며 까칠하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까칠하면 주님이 욕먹습니다. 그리고 전도가 안 됩니다. 

  성도들 모두 생활환경이 다르고, 직장이 다르고 소득이 다르고 가정과 가문이 다르고......, 다른 것 투성이 입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자신과 비교하고 자신의 것만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교회를 세워가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가 바로 '관용'입니다. 

  늘 그럴수도 있지!,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관용하면 다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지’ ‘너그러워야지’ ‘다 봐줘야지’하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없던 관용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관용이란 것은 사실 우리의 육적인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만 그래서 매일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지만,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고 절대로 관용과 사랑을 베풀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한다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 폭행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자신이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관용을 입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관용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알만큼 관용을 배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가까우시다"라는 말씀에는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시간적인 의미로는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기회가 있을 때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날 날이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공간적인 의미로는 주님이 가까이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용을 베푸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훌륭해서 관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가까이 계시기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관용하는 생활을 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관용의 마음이 풍성한 성도는 감사와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가 관용을 잃을 때, 우리 마음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평안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용을 베풀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까우시니 우리가 관용하면서 당한 억울한 것도 신원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점점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생애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지금 이 순간 순간을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상 30장 전후를 보면 다윗이 인생에서 정말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가드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였습니다. 

  불레셋 가드왕 아기스가 하필이면 이때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자했고, 이로 인해서 그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가드왕의 신하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불신함으로 자신들의 거처인 시글락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틈을 타서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해서는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갔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에게 가족을 빼앗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말렉을 뒤쫓아가게 됩니다. 가다가 지친 다윗의 부하 200명이 브솔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들을 남겨두고서 아말렉을 뒤쫓아가서 대파하고 자신과 백성의 가족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지친 채 브솔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 이백 명을 다시 만납니다. 브솔에서 보여준 다윗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관용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피곤하여 브솔에 머물러 있던 이백 명에게 올 때 그들이 다윗과 백성을 영접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 때 다윗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함께 가지 않은 이백 명에게 가족만 데리고 떠나게 하고 도로 찾은 물건을 주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23절) 

  그리고 연약해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이백 명에게도 동일하게 나눕니다. 다윗의 생각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는데 연약하여 함께 하지 못한 동료에게도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을 관용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악한 자들과 불량배들의 생각을 거절하고 지쳐 있던 군사에게 관용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사랑, 이웃사랑보다는 자신의 법적 권리와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만약에 우리 삶의 태도가 나의 정당성이 아닌 하나님의 관용에 기반을 둔다면, 교회와 사회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정말 놀랍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용이 있어서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일이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인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