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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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유앙겔리온 2024. 7. 1. 19:57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4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시대를 일컬어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어디 이 시대의 특징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의 모든 시대와 인간에게는 기쁨을 빼앗길 위험인자를 장착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입니다. 

  바울사도가 사는 시대였던 초대교회 시대에도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이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바울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빌립보 교회에도 기쁨을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절박하게 기쁨을 강조하고 있고 잃어버린 기쁨을 복구하도록 강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기쁨”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님으로부터 주안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신 주님,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삶이 새로운 삶이였고 경이로운 삶이었고 기운이 나는 때였습니다. 

  특히, 빌립보 교회는 바울사도가 아시아 선교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을 때 그 길을 막으시고 환상중에 마게도냐로 부르심으로 발걸음을 그리로 옮겨감으로 시작된 첫 번째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오직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 마게도냐로 가서 첫 성인 빌립보에서 머무르면서 안식일이 되어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 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여시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바울사도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함으로 그 집에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귀신들린 여종이 고침받은 사건,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감옥의 문이 열림으로 인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실력있는 사람들이 합류하여 복음의 일을 많이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빌립보교회가 기쁨을 잃게 하는 문제가 어느 순간에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사랑, 처음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은 연륜이 깊어질수록 아름다워야 합니다. 세월을 지낼수록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그럴려면 처음 자세를 놓치지 않나냐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시작되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로 빌립보 교회가 기쁨을 회복하고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서는 기쁨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기쁨의 서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빌립보서의 의도를 훼손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빌립보서가 기쁨을 강조한 이유는 기뻐해야 할 교회가 슬픔과 걱정과 근심이 빌립보교회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기쁨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시대적인 특징이 아니라 한 개개인의 삶의 특징이고 공동체 마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것을 강조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본 서신을 쓸 당시에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의 삶은 자연적으로 거저 주어지거나 시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하고 결단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으로 살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이 가지는 특징은 바로 “명령이라는 특징”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감정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쁠 때보다는 슬프고 괴롭고 힘들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만 있겠습니까? 조금 모자라거나 상황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어떻게 항상 기뻐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정문제도 있고 건강문제도 있고 직장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 문제가 한 두가지 이겠습니까? 

  그러는 가운데서 인생의 낙을 누리는 것(즐겁게 사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도록 주입시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놓치면 안됩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교회생활이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들 가까이엔 기쁨을 빼앗아 가는 기쁨 도둑이 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 서서 서로를 도와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기쁨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명하는 명령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인줄 믿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쁨이라는 말이 326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 기쁨은 주님과 관계 속에서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가 된 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어려운 일 만나면 사람들이 나타나내는 태도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더 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은 상식적으로 나타내는 보통사람들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취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했습니다.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로 나아가서 물을 길러 올리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순종하고 지속적으로 화를 내거나 침체된 상태에 있으면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게 됩니다. 오염된 우물에서 오염된 우물을 길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라서 기뻐하는 생활을 하면 기뻐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