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아비의 훈계와 경계(잠 15:5) 본문
아비의 훈계와 경계
잠 15:5
잠15: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부모의 역할 중에 하나가 자녀들에게 "훈계와 경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훈계와 경계는 부모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자녀가 바른길로 가도록 자신이 앞서가면서 힘껏 도와주며 훈련시켜 주며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훈계와 경계로 부모님이 부모님의 역할을 할 때, 자녀들은 그 훈계와 경계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것이야 말로 부모공경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한 "훈계"는 히, "무싸르"로써 "잘못을 잘 고치다, 정정하다. 꾸짖다, 나무라다, 징계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경계라는 말은 히, "토케하"인데 "논증하다. 보여주다, 입증하다, 증명하다, 고쳐주다, 바로잡다, 꾸짖다, 해결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두 말이 비슷한 말입니다.
남이라면 지나칠 수 있는 있는 것들이만 부모이기에 바로잡아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 29: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올바르게 자라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 데 그것은 그 부모가 자녀들을 훈계하고 경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로 아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부만 잘하면 결국 더 나쁜 인간이 될 가능성만 높여주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어느 수능만점자의 일탈행위가 도마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잠언은 부모로 하여금 훈계와 경계를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아서 주의를 받았다면 일반적으로는 그 부모는 그가 누구든지 미안함을 표시하고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은 자신의 자식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이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의를 주는 이에게 화를 내지릅니다. 자신의 귀한 자식에게 왜 훈계를 하느냐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부모가 똑같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잘못을 보고 그 잘못함을 알고서도 그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망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을 훈계하고 경계하는 것은 자식을 위한 것입니다. 훈계와 경계를 받지 못한 작은 잘못된 습관들이 모여서 나중에 큰 범죄자가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훈계와 경계는 의인을 만들고 건강한 시민을 만드는 일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이런 "훈계와 경계"를 달게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그 낳은 자녀들에게 "훈계와 경계"를 하도록 책임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부모의 훈계와 징계가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회적인 통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역할이나 기능에 관계없이 사람답게 대우받아야 할 자유가 있으며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이것을 자신의 자식에게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인권의 침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고 경계할 때, 아이의 부주의가 부모인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어어질까봐, 아주 작은 피해라도 자신이 입게 될까봐 가시 돋친 말로 훈계와 경계를 한다면 그것도 옳은 일은 아닙니다. 어른인 나와 다른 생각, 행동, 속도가 미숙함으로 느껴져 내 신경을 거슬리므로 부르르 화를 내며 훈계하고 경계했다면 그것은 어른답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의 "훈계와 경계"에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 행하심이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훈계와 징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도 훈계와 경계를 아끼지 아니하면 안되고 성품이 냉철하게 훈계와 경계를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새벽에 묵상했던 잠17:27절에"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했습니다.
이렇게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 행하심을 가지고서, 훈계와 징계를 아끼고 냉철한 성품으로 훈계와 경계를 하는대도 이런 훈계와 경계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다." 히 "나아쯔"는 "조롱하다. 멸시와 비웃음으로 거절하다. 하찮게 여기다. 경멸하다"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과 그 행하심을 가지고 그 자녀를 위해서 훈계와 경계를 해도 그 훈계와 경계를 "조롱하고 멸시와 비웃음으로 거절하고, 하찮게 여기며 경멸하는 자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작년 년말에 경기도 오산에서, "여자친구를 왜 집에 데려왔느냐"고 훈계한 엄마를 폭행한 고교생 아들이 현행범으로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훈계와 경계를 업신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미련한 자"일뿐임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련한 자"는 히 "에빌"인데 "괴팍하다"는 뜻을 가진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바보, 어리석은, 미련한, 우매한자"를 뜻합니다.
훈계와 경계를 해도 괴팍하고 우매한 자식은 그 부모의 훈계와 경계를 업신여깁니다. 이런 자식은 아무리 날카롭게 비난하고 질책해도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그 부모는 부모된 책임으로 훈계와 경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훈계와 경계를 즐거이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즐거이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는 "슬기를 얻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기를 얻는다는 말은 히, "아람"은 "계교,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부모나 자식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함과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고 도리어 구박하고 어미를 경계를 싫어하여 그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금주 한주간이라도 훈계를 받는 지혜와 꾸지람을 받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