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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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3~16)

유앙겔리온 2024. 2. 19. 12:28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 4:13~16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벌써 새해가 시작되어 1월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흐르는 시간은 인생을 묵히게 하고 자라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묵혀져야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묵혀지면 나쁜 것들도 세상에는 많습니다. 어떻든 묵혀짐은 시간의 양이 절대적인 관건입니다. 묵히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수적 요소입니다. 어떤 것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가치가 올라가고 어떤 것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가치를 잃게 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에 보화가 더 많이 쌓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보화가 쌓이는 것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정점이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서 변화와 성숙을 이루어가는 것이 정점인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영적성숙도 시간만 흐르면 거져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영적 성숙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됨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시간의 묵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영적 성숙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라야 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영적 자람과 영적 성숙은 그 사람의 눈과 귀와 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눈과 귀와 입은 숨길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하면 눈과 귀와 입이 바뀝니다. 오늘은 영적 자람과 영적 성숙이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하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눈의 변화, 

  바울사도는 고전 13:12에서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고, 부분적으로 보이나 그때는 분명하고 온전하게 보게 된다."고 눈의 변화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보는 것에서 변화를 보입니다. 희미하게 보던 것, 부분적으로 보던 것을 분명하고 온전하게 보게 되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눈으로 사셨습니까?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 예수님의 눈길이 꽂치는 곳, 예수님의 눈길이 꿰뚫는 곳에는 언제나 기적과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면서 예수님의 눈길처럼 우리의 눈길이 바뀔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최고의 변화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는 것을 우리의 눈이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우리 눈의 최고의 변화는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 믿습니다.

  2, 귀의 변화,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듣는 일에 둔한 귀가 있습니다. 히 5:11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듣는 것이 “둔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듣고 지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둔하다’ 헬, ‘노드로스’는 ‘게으르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타성에 빠져서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인과 의인 모두에게 귀 기울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듣기 싫은 것은 듣지 않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들을 때가 많습니다. 

  쓰디쓴 훈계와 경계는 귀담아 듣지 않고 달콤한 칭찬과 위로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영적성장이 한 영혼에게서 일어나면 비로소 듣고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정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닫히고 둔한 귀가 열리고 민감한 귀가 됩니다. 

  3, 입의 변화, 

  예수님의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입을 얼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술은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입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술을 열어서 "언제나 평안하뇨?"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어떤 집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평안하기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예수님의 입술이 사용된 이유였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말하는 것에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의 언어생활은 불평에서 점점 감사로 변해갑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감사할 것보다 불평할 것을 찾습니다. 

  바울사도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으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 내 가시 없애주세요. 내 가시 없애 주세요” 그러다가 “하나님 가시 감사합니다. 가시도 은혜입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한 "가시"는 "스콜롭스"였습니다. 스콜롭스는 "십자가, 날카로운 막대기, 말뚝이나 날카로운 창"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가시는 장미나 선인장의 가시 정도가 아니라 말뚝이나 뽀쪽하고 날카로운 창을 가리킬 때 쓰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이런 가시조차도 감사로 변해갑니다. 그것이 영적 성숙의 모습입니다. 

  영적 성숙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의 특징은 눈과 귀와 입에서 잘 나타나게 됩니다. 아이의 단계는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안정됨이 없습니다. ‘불안정’합니다. 늘 흔들립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 사람은 눈과 귀와 입이 복스럽습니다. 자기 중적이지 아니하며, 불안정하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바울도 변화되기 이전에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8-9)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그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 3:8)?이라고 함으로써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나이 먹은 말년에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5-16) 했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귀와 입이 잘 묵혀지고 숙성되어서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어떤 경우라도 눈과 귀와 입이 안정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