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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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내 자신 길들이기(민 14:36~38)

유앙겔리온 2024. 1. 15. 13:34

내 안에 있는 내 자신 길들이기 
민 14:36~38 

민 14장 36절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민 14장 37절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민 14장 38절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이런 저런 탓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견주어서 영국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는 그의 수필 '비평'에서 '7명의 바보들'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첫째, 어제의 실수를 보면서도 고치지 않는 사람.
둘째, 성공한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연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셋째, 자기 생각을 바꿀 용기가 없는 사람.
넷째, 행운이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사람.
다섯째, "저건 될리가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여섯째, 쓸모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는 사람.
일곱째, 하나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바보들이라 했습니다. 바보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즐겨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렵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곱 바보들의 생각과 발차취를 따라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내 안에 포프가 말한 바보가 몇 명이나 살고 있는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변에는 늘 남의 탓, 환경 탓 하면서 지내는 바보들이 없는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바보들을 내 안에 담고 함께 지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바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 14:7절에서 "너는 마련한 자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이 있음을 보지 못함이라"했습니다. 미련스운 자앞에 맴돌다가는 그와 함께 해를 당하게 됩니다. 

  출애굽공동체는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 모여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먼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보냈습니다. 

  이 출애굽 공동체는 바로 "나"입니다. 그리고 12명의 정탐꾼들은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이기도 합니다. 

  보냄을 받은 그들은 약속의 땅을 정밀하게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정탐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정탐보고는 두 갈레로 선명하게 나누어졌습니다. 

  12명중에 다수인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대중에 영합하는 보고를 함으로 인해서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곽광을 받았습니다. 대중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인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하는 바람에 대중들로부터 몰매를 맞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수를 대중(大衆)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요즈음 입만 열면 정치인들이 들먹이는 소위 '포퓰리즘(Populism)'이란 말이, 바로 이 대중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이나 활동을 말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만 이 포퓰리즘이 팽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중주의, 민중주의의 포퓰리즘은 모세가 출애굽공동체를 인도했던 광야시대에도 팽배했고, 예수님시대에도 별 다르지 않았고, 오늘 이 시대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대중주의, 민중주의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여론몰이를 했고, 대중을 선도했습니다. 웃기기도하고 울리기도하고 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원망과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거하고 인간이 역사를 주도하겠다는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은 대중과 민중에게 심은 것입니다. 

  원래 정탐꾼의 파송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들어가야 땅을 잘 살펴서 출애굽공동체가 가나안 공동체가 되도록 길을 열고 방법을 모색하고 준비하는 준비위원회였던 샘입니다. 그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0명은 그들의 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잃었습니다. 구실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크고 견고한 성문화, 성곽과 성문, 성루와 망대, 잘 훈련된 군대와 무기들, 잘 경작되고 있는 농토와 잘 구비된 성읍드을 보고서는, 떠돌이와 같이 성 하나 훈련된 군사 하나 없는 자신들이 초라해 보였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 자신들은 그들의 밥이 될 것이라 단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단정을 공식화해서 대중을 선동했습니다. 

  이들의 부정적인 보고와 대중이 만날 때 불신앙의 극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는 정탐꾼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30일 동안의 정탐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보고의 결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출애굽공동체는 바로 가나안에 직행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을 바로 눈 앞에두고 광야를 38년 동안이나 유리 방황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선명하게 등장하는 두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재앙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재앙의 원어는 '마게파'인데, "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공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치심을 받아 처참한 죽음을 당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생존하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생존'이란 말의 원어가 "하야"입니다. 살아남음입니다. 성경에 수도없이 나오는 "살리다. 살리라"는 말씀이나 '부흥케 하다'는 말씀이 다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하야"입니다. 

  처음에는 열 명이 두 명을 거뜬하게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안전하리라 생존하리라 생각했던 열명은 치심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을뻔한 두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지만 그들은 굳건하게 생존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에 대해서 고전 10:10~11절에서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했습니다. 

  살고 죽고의 결말이 내 안에 내 자신을 어떻게 길들이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이렇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는,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내"가 있고, 긍정적으로 보는 "내"가 있습니다. 이 비율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사는 인생과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사는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이 비율에 따라서 어떤 인생은 절대 불평인생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인생은 절대 감사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내 안에 있는 내 자신"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그 비율이 어느 정도 될까?를 어림짐작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예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10:2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인 것이지요. 10명의 부정적인 정탐꾼과 2명의 긍정적인 정탐꾼 정도 된다는 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비율입니다. 

  출애굽공동체 정탐꾼의 비율이 2:10이나 6:6 정도만 되었어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정적인 자아를 줄여가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지라도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내 안의 "나"는 다스려져야 하고 길들여져야 할 자기인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