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사람(시 56:8) 본문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사람
시 56:8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신이 치료하고 돌보던 10대 환자를 잃고 오열하는 의사의 가슴 아픈 모습이 전해진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아쉽지만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진을 게재한 이는 자신의 직업이 응급구조사(EMT)라고 밝혔는데요. 남부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목격한 사연이라고 합니다. 그가 공개한 사진 속에는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건물 외벽을 잡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슬픔에 비통해 하고 있는지,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그의 어깨를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가슴 먹먹한 사진이었습니다.
의사라고 하면 죽고사는 문제에 인정사정도 없는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명을 가지고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이 희망을 줍니다.
사명을 가지고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난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놓친 생명에 대한 죄책감에 스스로 사로잡히는 바로 그것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눈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가운데 자기가 능력을 다했으나 이 사진의 의사처럼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못하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눈물을 흘릴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흘린 눈물은 모두에게 위로를 주고 신뢰를 안겨다 주며,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받으시는 것이 이렇게 흘린 눈물임을 믿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받아누리게 하는 것이 눈물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눈물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이 눈물입니다. 이처럼 눈물은 귀중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눈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시편의 기자인 다윗은 그 누구보다 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을 달고 살았던 대표적인 눈물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모르고 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웃고 살았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은 주의 병에 담아 흘러넘칠 만큼 많은 양의 눈물을 흘렸음을 성경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을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 누구보다 더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렸던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없어서 타락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한 눈물이 마름으로 인해서 영적 퇴보에 들어서게 됩니다.
골방에서 홀로 우는 눈물이 없는 사람은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천사의 방언은 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굳어져 강팍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회개하며 밤낮 침상을 적시며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인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가족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친구 요나단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고, 대적들과 배반과 배신하는 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와 관계된 이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는 사울이 길보아전투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위해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10여 년간 다윗이 겪은 위험, 역경, 두려움, 외로움, 고통, 상실은 모두 사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전사한 것을 위하여 울고 금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사람들을 향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고통 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셋째로,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향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달 받을 때는 다윗이 자기가 싸울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그 소식은 환란이 끝나는 것이며, 영광을 얻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의 패전과 그들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패배와 직결된 것이기에 국가적인 치욕이요 민족적인 재난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그는 울 기력이 없도록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나라와 민족이 환란을 당할때마다 그는 눈물 흘리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현실을 보면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오늘 이 민족을 향한 예수님의 눈물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흘린 다윗의 눈물이 가지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보라고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흘린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물을 담아줄 하나님의 눈물 병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다윗의 눈물은 믿음없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슬픈 일을 당할 때마다 흘린 눈물을 병에다 담아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마칠 때에는 눈물 병을 관이나 무덤에 넣어주기도 하였다고 하지요. 그것은 이는 그 눈물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고 보상해주신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이 풍습을 연상하며 하나님의 눈물 병이라 표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담을 눈물병을 갖고 계시면서 성도의 눈물을 그렇게 담아두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유리함을 계수하셔서 그가 흘린 눈물을 그의 눈물병에 담아주셨다면 더이상 그 눈물은 결코 패자의 눈물이 아닐것입니다. 그 눈물은 승자의 눈물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담아두는 눈물병을 가지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눈물병에 가득채울 눈물이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