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시 86:17) 본문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시 86:17
시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오늘 시편기자인 다윗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한 가지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다윗이 구한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확실한 "은총의 표적“이었습니다. "주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표적은 표적인데 다른 어떤 표적이 아니라 "은총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은총의 표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것만 있으면 되겠다 싶었을까요?
여기 '은총'으로 번역된 말은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헨)나 자비(헤세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헨'이나 '헤세드'가 아니고, '토브'가 사용되었습니다. '토브'는 구체적으로 ”좋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구한 '토브의 표적'은 그를 하나님의 백성, 주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시는 것, 천하만민 중에 구별된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 그래서 고난중에서 지금까지 수 없이 건저주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해 주심으로 좋은 것 주시고,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지난날 받아 누려왔던 은총의 표적을 다윗은 어려울 때, 이것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자신을 치러 달려오는 원수들, 그들은 교만한 자요, 강포한 자요, 무법한 자들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처럼 험악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 "은총의 표적"을 다시 보여주시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인생 살면서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윗과 같은 그런 힘겨운 문제를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믿음 안에 거하며 사는 자는 다윗처럼 "은총의 표적"을 간구할 섯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구하기는 커녕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며 믿음의 길에서 떠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은총의 표적이 있는 사람과 은총의 표적이 없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은총의 표적이 있는 사람은 낙망하지 않습니다. 고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윗이 힘겨운 날에 이처럼 "은총의 표적"을 구한 것은 첫째로, "여호와,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서 이렇게 나를 도우시고 위로하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은 힘겨운 날에 자신과 함께 하시고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움을 떨치고 승리의 길을 걸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두말할 것 없이 주님이 은총의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께서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은총의 표징이 내 삶속에서 환하게 보인다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믿습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자신의 경험속에만 감추어두지않고 다른이들에게 알게해 주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다윗이 이처럼 은총의 표적을 구한 것은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부끄러워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을 미워하여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포악하고 잔인하게 움직이나 다윗은 그들을 오히려 안중에 두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자신에게 은총의 표적을 주신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의 표적은 믿는 자의 대적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할 표징'이 되는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믿는 다윗은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향한 미움과 증오 대신에 오직 힘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주목했습니다.
요즘처럼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역 가운데 다윗이 구한 것과 같은 "은총의 표적"이 필요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을 만큼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이 절실하고 절실합니다.
신령한 것이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게 많이도 조롱당하고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그들을 바라보고 조마조마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총의 표적을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담대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 만큼 지금 우리 복음적인 교회와 크리스찬 사역자들과 복음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의 표적"입니다.
확실하고 선명한 은총의 표적이 필요합니다. 이 은총의 표적을 희미하게 하고, 이 은총의 표적을 잃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도리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두러워 해서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기자인 다윗은 자신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만 있으면 문제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가득하고, 그들의 포악함이 극에 달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힘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은총 배풀어주셔야 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총을 배풀어주시는 곳, 그곳이 나의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은총 배풀어주시는 것이 자신이 가진 가장 큰 힘이요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하나님께 은총의 표적을 보여주시기만을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은총의 표적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까?
항상 구하되 특별히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힘겨운 날에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은총의 표적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저항할수도, 지울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은총의 표적이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