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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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에서 즐거움으로(잠 12:25)

유앙겔리온 2023. 11. 27. 10:54

근심에서 즐거움으로
잠 12:25 

잠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근심과 즐거움은 사람의 정서(감정)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사람은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근심과 즐거움은 상반된 감정입니다. 근심은 우리의 삶을 어둡게 하고 파멸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즐거움은 우리의 삶을 밝게 하고 성공으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즐거움은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근심은 그 근심하는 자로 하여금 '번뇌'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번뇌'는 히브리어로 "솨하"란 말인데 "엎드리다, 몸을 구부리다, 굴복하다. 풀이 죽게 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현대사회도 그렇지만, 고대 근동에서의 하루하루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전쟁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전쟁에 패한 왕은 승리한 왕 앞에 쥐죽은듯이 몸을 구부려 납작 엎드리게 됩니다. 승리한 왕은 엎드린 왕의 목을 밟고 살릴지 죽일지를 결정합니다. 

  목이 밟힌 채로 엎드려 있는 왕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장의 군화발 아래 엎드러 있는 그 패한 왕의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짧은 순간이지만 억겁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낫겠구나 하지 않겠습까? 이판사판 빨리 끝났으면 좋겠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오늘 말씀에서 근심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번뇌'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근심은 마음을 맥풀리게 하고, 일을 행할 때 있어야 할 활기나 강인함으로 노력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근심은 의욕을 가라앉게 합니다. 일할 의욕이 달아나버립니다. 마음이 그러하면 육신도 거기에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잠 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했습니다. 

  한국 통계청의 통계에 의하면 자살하는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나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그 숫자가 많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마음에 근심이 있었음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근심없이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교롱사고나 산업재해 근저에도 드러나지 않으 숨은 근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근심은 그만큼 위험한 정서인 것입니다. 

  사람은 근심의 환경에 놓이면 자신도 감당이 안되는 일을 벌릴수도? 있는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근심 가운데서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근심이 우리 심령 가운데서 이리저리 휘젖고 다니도록 그냥 방치 해서는 안됩니다. 근심에서 즐거움으로 빠른 전환이 필요합니다. 근심으로 찾아온 번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근심을 즐거움으로 바꿔야 합니다. 

  믿음은 근심을 즐거움으로 빠꾸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이 능력이 탁월해지는 것입니다.

  근심으로 번뇌할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근심을 치료하는 약일까요? 무엇으로 그근심을 없앨수 있겠습니까?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취해도, 없어지거나 그 강도가 절대로 약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할수록 근심의 짐이 더해질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 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선한 말"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근심을 덜고 근심이 마음의 번뇌로 가지 않게 막고 그것을 즐겁게 바꾸어내게 하는 그것은, 그 방법은 "선한 말, 소망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죽을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근심으로 번뇌할 때 "악한 말이나 소망없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 번뇌만 더할 뿐입니다.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일뿐입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 119:23~24절에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넘쳐나는 것이 앉아서 비방하는 고관과 같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비방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치유자가 필요합니다.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선한 말로 기쁨을 주는 자, 사람을 세워주는 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근심으로 번뇌하는 이를 위하여 선한 말로 이웃을 즐거워 하도록 섬기고 세워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이들은 선한 말로 우리 이웃을 위한 즐거움의 조력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즐거움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게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기운이 납니다. 활기를 얻게 됩니다. 의욕이 생깁니다. 기력이 쇠한 사람이 수액 하나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게 결정적으로 "선한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렘 15:16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주의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씀이신 주님이 우리의 상한 감정의 치유자이십니다. 근심을 즐거움을 바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율례들, 주의 증거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치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 특히 복음의 선한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는그 어떤 선한 말보다 우리를 근심에서 은혜로, 근심에서 즐거움으로 인도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근심은 사라지고 즐거움의 샘이 터집니다. 

  근심과 걱정의 안개가 우리 마음에 자욱할 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믿음으로 복용하면 근심과 걱정의 안개는 걷히고 기쁘고 참된 평화가 넘치는 가우데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