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트집과 탓(욥 40:1~5) 본문
트집과 탓
욥 40:1~5
욥40: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욥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40: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40: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트집 잡고 탓만 하는 일에 잡착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거나 뒷걸음 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트집을 잡고 탓을 하기보다 유산으로 여기고 잠잠히 받아드리고 교훈으로 수용하여 사회적 자산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욥은 온전한 믿음으로 늘 칭찬을 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너는 "트집 잡는 자",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는 두가지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호칭을 받은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가 예기치 않은 큰 재앙으로 놀라고 절망했을 때였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온 자신이 왜 이런 재앙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를 찾아온 세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논쟁을 하면서 불평을 좀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너는 나를 "트집 잡는 자요, 탓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트집 잡는 자'라고 하셨는데, 이는 욥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탄식하고 줄 기차게 질문한 모습을 평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탓하는 자'라 하셨는데, 히, '모키아흐'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히브리어의 의미는 옳고 그름을 정해 주는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호칭으로써 욥의 행동을 풍자하시며 그의 부족함을 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욥을 몰아붙이고 욥을 죄인취급하면서 잉과응보를 주장하는 욥의 세친구들이 옳고, 욥이 틀려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기대하는 기대치를 다른 세 친구와 동일하게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살든지, 욥 너는 하나님을 트집잡거나 탓하는 자가 되지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어떤 것도 다 지으실 수 있고 가져다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사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역설적인 하나님의 섭리도 기꺼이 수용하고 사는 것,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 그러나 반듯이, 인생 지성들이 결론 내린 모든 주장, 이념, 사변들이 지진에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인생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들면서 트집이나 잡고 탓이나 하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헛되고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와 같은 지혜서의 결론이며 이것을 위하여 지혜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트집잡고 탓하며 평가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절대시하며 마음껏 하나님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난도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어리석고 무지한 일을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트집'은 맘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탓'은 일어난 사고, 사건, 문제 등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사명자라면 모를까 욥에게까지 너는 트집과 탓쟁이라 하신 것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잠깐 쏟아냈던 하나님을 항한 공의로움에 대한 의심과 불평을 창조주가 실수 했다고 주장하며 전능자를 나무라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치겠다는 것으로 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싸우려고 하고 하나님을 가르치려하는 교만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그리고 믿음을 지켰지만 극심한 고난 속에서 그의 마음이 평정을 잃었습니다. 그 마음에 불평이 싹이 튼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트집고 하나님을 탓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놓치지 아니하시고 욥의 마음속에서 깨트려놓으신 것입니다.
욥은 이에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욥을 "트집 잡는 자와 탓하는 자로" 말씀하셨을 때에 취한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탄식과 질문이 그렇게 들렸고 보였다면 이제 내 손으로 내 입을 가려 트집과 탓을 하지 아니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음을 겸손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트집과 탓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트집과 탓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주로 인생을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의 양식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상처뿐인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신 일들을 내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트집과 탓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트집과 탓 없이 잠잠히 받아드리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의 수준은 믿는 이가 "트집과 탓"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트집잡고 탓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결정 짓는 일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트집과 탓을 돌리지 않는 신앙인격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의 수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믿는 다면 트집과 탓없이 수용하고 수락하는 태도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참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보일 태도는 우리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모든 일들 까지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신앙, 이런 인격과 품성으로 평생작품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트집과 탓'에 젖어 사는 이는 신앙인생이면서도 신앙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힘들게 신앙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트집과 탓으로 불평하는 굽은 마음과 굽은 입술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찬양의 마음과 입술로 속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신앙의 능력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는길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으면, 닥쳐오는 고난도 귀한 선물이 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트집과 탓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시기를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 길에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트집과 탓'이 없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성도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종을 배우고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