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다윗이 쏟은 우물 물(삼하 23:13~17) 본문
다윗이 쏟은 우물 물
삼하 23:13~17
삼하23: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삼하23: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삼하23: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삼하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삼하23: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때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블레셋의 본 진영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다윗의 고향땅인 베들레헴이 블레셋에게 점령당하여 그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요새가 되었던 것입니다.?
14절에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비통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가운데 독백처럼, 시처럼 "내 고향 베들레헴 성읍 곁 우물의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구나, 누가 나를 위하여 그 우물 물을 마시게 할꼬!" 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때, 이 탄식을 그냥 흘려듣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장수 3명이었습니다.
오늘본문은 이 세 장수의 무용담을 소개하면서 다윗 곁에는 이와같은 장수들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사무엘 하, 기자가 체택한 자료가 되겠습니다.
그들은 일말의 두려움이나 망서림 없이 생명을 걸고 블레셋 적진을 뚫고 달려가서 그 우물 물을 떠왔습니다.
다윗의 군대 본진은 베들레헴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지점의 아둘람 굴에 있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아둘람굴 거기서부터 적들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우물 물을 구해 왔다고 오늘 본문 16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여기서 '돌파하고 지나가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는 '가르다. 쪼개다. 찢다. 배어내다. 부수다. 째다.? 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 용사가 블레셋의 군사들을 정면으로 꿰뚫고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렇게 가져온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받아든 다윗은 그 우물 물을 어떻게 구해왔는지 알았기에 그 물을 시원스럽게 자신이 마시거나 몇사람이 나누어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우물 물을 땅에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효율을 따진다면, 생산성을 따진다면 길러온 우물물을 그렇게 취급할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물을 땅에 쏟은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서슴치 않고 물을 땅에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다윗이 저럴 수가 있을까? 부하장수들이 목숨 걸고 떠온 우물 물을 아깝게 버리는 일을 할까? 자기 먹기 싫으면 나에게나 주지.
예수님도 그런 비난을 받으신적이 있으셨습니다. 복음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건 중에 하나인 향유옥합을 깨뜨려 주께 부어드린 여인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아까운 것을 쏟아부어 허비하느냐 차라리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 훨씬 낫겠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나의 장례를 위해서 그리하였음으로 그를 괴롭게 하지말라, 이 여인의 일이복음이 전해지는 곳과 때마다 전해지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지금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준비하고 그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려야 할 때임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에 다윗이 우물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버린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사무엘하 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윗의 이 행위를 "이 우물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소원해서 얻게 된 우물 물을 자신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그 물을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우물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기 위해서 땅에 우물 물을 쏟을 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마도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이 우물물은 내가 마셔야 될 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셔야 할 물입니다." 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마시는 대신에 하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으로서는 다윗 위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도 하나님 앞에 한 사람,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부하장수들의 생명이 담겨 있는 그러한 우물 물을 마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만한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시에는 신비에 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우물 물은 자신이 마셔야할 우물 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어드려야 할 생명의 피와 같은 우물 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만한 일에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고 지나가게 해서 가져온 물을 마셔야 할 만큼 그런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높은 지위나 그만한 것쯤을 요구해도 된다는 것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효율을 따지고 생산성만을 따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지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했다는 것입니다.
필연코 여기서 다윗이 그 우물 물을 내것이라고 여기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면은 많은 것을 잃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물 물을 버려 관계를 얻습니다.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생명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부하장수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물을 마셔 목을 서늘하게 하는것 보다 물을 땅에 부어 마음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베들레헴 우물 물을 자신이 마시지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리면서 어찌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내던져 떠가지고온 피같은 물을 내가 마실 수 있겠는가? 했을 때, 당사자인 장수들과 그와 함께 한 군사들이 얼마나 감격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다윗 만세를 부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다윗은 과연 다르구나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은 우물 물이란 작은 물질을 버려 위대한 마음의 가치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했기 때문에 주어진 지혜였습니다.
다윗의 세 장수들이 다윗의 목마름을 위하여 블레셋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우물 물 한바가지를 가져온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이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자신의 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이고 생명이며 삶인데 우리의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고집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을 주님께 부어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