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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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분노 다스리기(잠 29:11)

유앙겔리온 2023. 9. 3. 18:13

내 안의 분노 다스리기
잠 29:11

잠 29:11"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 순간적인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욱 범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런 분위기에 휩쌓여 모방범죄를 하겠다고 예고하는 일들까지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어서 사회적인 큰 불안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우리 사회를 점점 불안사회로, 수치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안에 분노와 화가 다 있습니다. 분노와 화는 다른 감정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그 감정을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분노나 화가 전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잘 다스리느냐 잘못 다스리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내 안의 분노와 화를  잘 다스리는 것이 그렇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분노와 화를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하게 되면 우리 자신과 주변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이 분노와 화는 시한 폭탄과 지뢰와 같습니다. 평소에는 꼭꼭 눌려 있다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이나 누군가에 의해서 건드려짐으로 인해서 터트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두사람이 행한 일이 메스컴을 타고 알려지면 유행병처럼,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터트려진 분노와 화는 자신과 타인과 사회를 모두 망가지게 하여 모두를 피해자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분노나 화와 같은 그 부정적인 에너지를 나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와 화를 적절하게 다루고 조절하는 방법을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안의 분노와 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어리석은 자로 분류할 수 있는 가인의 분노의 결과는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그는 그 마음에 분노가 일자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서 돌로 처죽이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신 하나님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 몰라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아시고서는 그를 벌하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놋 땅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도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자로 분류할 수 있는 요셉이 다루는 분노와 화를 보세요. 요셉은 자신의 분노와 화를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죽이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모두를 살리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제들에게 미움받음으로 온 분노와 화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과 꿈꾸는 자라는 것 때문에 그를 미워했고, 죽이고자 했고 팔아먹기 까지 했습니다. 팔려간 곳, 애굽에서는 보디발이라는 장군의 집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아내의 음심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짓고번을 당하게 되었고 그 일로 요셉은 감옥까지 가게 된 분노와 화도 컸을 것입니다. 감옥에 가서는 선의를 베풀어주었으나 그 은혜를 잊어버렸던 애굽왕궁의 관료들로 인한 분노와 화도 있었을 거구요. 이런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 많은 분노와 화를 누구를 해하는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구원사적으로 일하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함부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오히려 담대해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의 생명을 살렸고, 세상에 닥친 7년 풍년과 7년기근을 잘 넘길 수 있게 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에서만 3번씩이나 그를 일컬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그것을 잘 못 처리하면 내가 그 분노로 인해서 망하지만, 분노를 잘 다스리고 처리를 잘하면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특별한 은혜를 입게?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화를 건강하게 다스리고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분노와 화의 감정을 절대적으로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용납하는 순간 신앙을 잃은 것입니다. 평판도 잃고, 안정도 잃고 쌓아온 덕도 잃게 되고 맙니다. 

  오래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과 다투거나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자기 집 정원을 하염없이 돌았습니다. 이 특이한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하니 남자가 집 정원을 돌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 남자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남자에게 화가 나면 왜 자신의 집 정원을 도는 건지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남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남자는 부자가 되고 노인이 되었지만, 예전처럼 남자는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똑같이 정원을 돌았습니다.

  이제는 남자의 집도 정원도 넓어졌고 몸이 불편한 노인이 되었기에 한 바퀴 도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면 여전히 집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의 손주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화나는 일이 생기면 집 정원을 돌았다고 하는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무에게도 대답하지 않던 남자가 손자에게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젊었을 때 남들과 다투거나 화가 나면 내집 정원을 돌면서 '내 집이 이렇게 작은데 남한테 화내고 싸울 시간이 어디 있나'라고 생각하면 화가 가라앉고 다시 일하는 데 힘을 쓸 수 있었지. 그리고 지금은 '내 집이 이렇게 넓어 마음에 여유가 있는데, 왜 남들하고 싸우며 살아야 해'라고 생각하면 바로 마음이 홀가분해지기 때문에 계속 집 주변을 돌고 있지."

  분노와 화를 터트리면 주위의 사람들은 많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바로 화를 내는 당사자입니다.

   잠 12:16절에도 보면,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했습니다. 

  내 안의 분노와 화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 힘을 잘 조절하고 관리하면 오히려 긍적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내 안의 분노와 화를 긍정적인 변화의 에너지로 만들어가는 것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꾸어가야 할 성품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인 여러분들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화를 건강하게 잘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