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0~37) 본문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30~37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눅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환경주일입니다. 한국교회가 40년 전부터 6월 첫째주일을 환경주일로 정하여 지키기 시작한 것은 그 만큼 환경위기를 그때부터 남달리 중요하고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유대인으로 추정되는 나그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에 강도를 당해 거반 죽은 상태로 길가에 버려진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지구의 자연환경 상태가 이 강도 만나 거반 죽어가는 자와 같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환경주일을 통하여 성도들과 교회가 자연 환경의 좋은 이웃이 되도록 권고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환경주일에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자비를,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도 순종하기 위하여 은혜를 함께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
자연환경은 우리의 오래전부터 이웃이며, 또한 우리의 새로운 이웃이기도 합니다. 이웃의 범위에 인류나 반려동식물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물질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모든 존재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새로운 이웃인 자연환경은 건강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강도만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는 이웃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 남용과 폭력적인 개발이라는 강도를 만난 지구이며 자연환경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우리의 이웃인 자연환경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한 공영지상파방송에서 '지구의 눈물 시리즈'로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등을 방영한적이 있었습니다. 그 눈물이 무슨 눈물입니까? 자연환경이 인간들이란 강도를 만나 흘리는 피눈물이었습니다.
근래에 유명한 휴양지인 괌에 태풍 '마와르'가 불었는데 태풍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태풍이 괌에 머물러 있으므로 인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계속해서 일본에까지 엄청난 폭우를 퍼부었습니다. 기후이상으로 발생한 일입니다. 이런 이상 현상들은 지구 이곳저곳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 강도 만나 피흘리고 눈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이웃을 대하는 성서시대 사람들에 대해서 해학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제사장이 보고는 그냥 피하여 지나쳐 가버리고 말았으며, 레위인 역시 마찬가지 였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껑충 뛰어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였습니까? 유다인들이 경원시 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부상당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간호를 해줍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온 말에 이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우고 대신 자신은 걸어서 여관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숙식비까지 지불합니다. 그리고 지불한 것보다 더 들면 오는 길에 그것까지 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결코 좋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우리는 상상을 할 수 밖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특별한 이웃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전혀 이웃일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들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좋은 이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대답이 "자비를 베푸는 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단호하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조건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좋은 이웃이 아니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해서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도 만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옛날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시대에 있었던 횡액을 당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먼저 본 사람이 조취를 취해야 하는 그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재난을 만난 사람을 보게 되면 일단 119에 알리고 현장 유지에 최선을 기해야 하는 것이 룰처럼 돼 있습니다. 함부로 피해자를 옮기거나 손을 대면 사건 현장의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좋은 일하고도 불려다녀야 하고 가해자로까지 몰리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에 외면하기 쉽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직전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눅 10:25~28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하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대답, 27절입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입술로만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할 자가 누구이겠습니다. 마음으속으로 머리속 생각만으로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입술로, 마음만으로, 머리속으로만 하지 말고 내 이웃의 신원이 고통받고 피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사마리아인처럼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처럼 레위인처럼 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하셨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강도 만나 신음하고 있는 자연환경의 상처를 보고 지나처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야 말로 자연환경의 이웃이 되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만난 이웃의 피눈물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상처를 찾아내어 소독하며 치료해 주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사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