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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시 89:15)

유앙겔리온 2023. 6. 1. 22:11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
시 89:15

시89:15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세상을 징징대며 울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항상 피해자 코스풀레에 사로잡혀 누구라도 붙잡고 함께 울어달라고 하소연하는 이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하거나 이런 사람들이 쌓여만 가는 세상이 복이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까?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성도가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성이며 복음적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울고 사셨던 분들도 주의 은혜로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즐겁게 소리치다'에 사용된 말은 히브리어로 "테루아"입니다. 테루아"는 아주 '떠들석하게' 기쁨의 함성을 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단어는 "나팔을 불다, 나팔소리"로도 번역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희년의 나팔을 불면 땅은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고 종들(노예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회복의 나팔소리, 즉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테루아'는 '루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루아'는 무엇을 손상시키고 깨트려서 귀가 먹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크게 소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테루아'는 혼자 속으로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떠들석하게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함성을 지르거나 승리의 개가를 힘차게 외치는 것을 뜻합니다. 내게서 시작된 함성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일깨우도록 내지르는 기쁨의 함성소리를 말하며 잠들어 있거나 넋놓고 있는 이들까지 깨우는 힘찬 나팔소리를 말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증거하고 모든 이들이 보아도 알 정도로 그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테루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테루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테루아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성령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을 찾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짜임새있고 잘 정리된 삶을 살아내는 것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욕심나는 부분입니다. 할수만 있으면 그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즐겁게 시글벅적하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를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이 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 주도권을 주님께 내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즐겁게 소리칠 백성이 되도록 그들의 백성들에게 그의 영을 물붓듯이 부어주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꽉쥐고 있는 순간에는 육신의 소욕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즐겁게 소리치는 백성으로 살지 못합니다. 

  육신의 소욕은 좀체로 만족할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육체의 소육은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소욕이라는 말은 원래, "갈망하다" 또는 "동경하다" 그리고 "욕심을 품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죄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며 동경이며 욕심입니다. 
  이런 육신의 소욕에 끌러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고 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육신의 소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주도권을 주님께 양보하고 살면 내가 성령의 전이 되어서 성령에 취하고 성령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고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않게 됩니다.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됨으로 자신도 일어서고 남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에 기도하려 가는 길에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고 즐겁게 소리쳤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배신자요. 신앙으로 말하자면 배교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잡혀 끌려갈때 멀찌감치 따라가면서 관망이나 하고 결과를 보아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타산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까? 

  결국은 작은 계집 종(비자) 앞에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바라바 대신 사형수로 판결받게 될때도 변호하거나 변증하기는 커녕 꾹 입다물어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지 못했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도망쳐버렸고 친히 거두어 장사지내야 할 수제자가 아리마대 요셉에게 그 책임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벌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도 그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이면서 수제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함량미달의 인간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인간 베드로는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한량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정도라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서 보는 바와같이 이 배신자가, 이 사명을 잃어버린 자가 성전 미문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예수를 부인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현장에서 서서 공개적으로 "우리를 보라"고 즐거이 소리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즐겁게 소리칠줄 아는 백성이 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의 역사로부터였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이 복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증이며 증언인 것입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했습니다.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닌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또는 빛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습니다. 얼굴의 빛은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얼굴에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얼굴 빛은 영혼의 모든 상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 빛에는 주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얼굴의 빛을 비춘다는 말은 돌아보시고 보호하시고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닌다는 것은 곧 주님의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살피시는 가운데 다닌다는 것을 말합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