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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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리이다(시 77:10~13)

유앙겔리온 2023. 5. 26. 16:24

기억하리이다
시 77:10~13

시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77: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77: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우리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기억"해야 하고 읊조려야 하고 되뇌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일컬어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자신이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으나 자신의 시선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고정시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읊조리고 되뇌이는 일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시인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항상 우리가 형통한 일을 만날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다'의 히브리어 "자카르"는 '마음에 품다'는 뜻입니다. '기억하다'는 말은 '생각하다'와도 같은 어원입니다 . 따라서 '기억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마음판에 새겨 절대 그 감사와 은혜를 품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출애굽을 통하여서 히브리인들을 구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행동하심과 연결된 기억하심'입니다. '기억하다. 자카르'에는 행동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 자카르' 이 말은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삼마, 여호와 라파 등 모든 하나님의 품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품성의 시작은 '기억하심'입니다. 기억하시기에 여호와께서 준비하시고,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여호와께서 치료해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기억은 그분의 계명과 율례를 순종하고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가 행하신 모든 일들을 믿음의 초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 자신에게 연결되어진 이들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키면서 "어버이를 기억"하는 날로 삼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레이반도에 있는 태국을 다녀왔는데요. 태국은 국토면적으로 하면 우리나라의 다섯배에 이르고 인구도 7천만명에 이릅니다. 건국 이래 한번도 식민지가 되어본 일이 없다고 나름 자부하는 나라입니다. 

  자연의 조건이 얼마나 좋은지 1년 내내가 여름이어서 슬리퍼 한컬레와 반바지 하나 반팔티셔스 하나면 어디서나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은 팔천불을 밑돌고 있고, 군부의 구테타만 19번이나 일어난 나라가 태국입니다.

  한국은 여기에다 비하면 정말 모든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과 그들의 차이가 있다면 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교육에 우리처럼 그렇게 올인하여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불만족도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받은 것이 없네, 왜 그렇게 밖에 못살았느냐"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에게 그렇게 모자라고 적은 것은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전부였을 것입니다. 자녀에게 더 주고싶지만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고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다 희생해서 교육받게 해주신 것의 결과로 오늘 우리가 이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들의 세대를 기억하지 못하고 부끄럽게만 생각하고 지우려고만 한다면 그분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고 죄송한 일입니다. 

  혹시 과소평가하고 무시했다면 오늘을 통해서 존경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은 자신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면서도 자녀들의 교육에 전적으로 희생해주신 부모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에게 무조건적인 존경을 드려도 괜찮은 이유가 많겠지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녀 교육의 열정입니다. 

  또 하나 그분들이 우리게게 정말 아무 것도 끼친영향이 없고 존경할 가치없다고 해도 그분들을 연결고리로 해서 오늘 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에 보내주실려고 했을 때 내 부모를 내 생명의 통로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곤경해야 합니다. 

  레 19:3절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각 사람입니다. 선별되거나 선택된 자들에게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모든 각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핑계도 대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부모모습 앞에 공경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고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를 기억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설혹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고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를 기억하면 살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바보처럼 취급을 당하거나, 선을 행할때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분께서는 모두 기억하시고 보상하실 것(갈 6:9)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일대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그 중에 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요셉이 자신이 짓지 않는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그곳에서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에게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게 되면 자신을 꼭 "기억"하고 감옥에서 건져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래 자리로 복귀하여 왕의 신임을 다시 받게 되었지만 요셉의 일을 새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할 때 그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어야 했던 이유는 그의 해석이 요셉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 복직한 후 이 모든 것을 다 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그가 요셉을 잊었다는 말은 단지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꿈 해석을 주신 하나님을 경솔하게 여겼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년이 지나서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는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일순간이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는 몹시 섭섭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결국 요셉이 신뢰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잊어버렸을지라도 그는 결코 잊지 아니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이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도록 하셨으며 결국 이런 상황들은 요셉을 기억하도록 강요하신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기억하지 아니하면 기억하도록 만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기억하도록 주신 이들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기억하는 자가 복이 있고, 또한 기억받는 자도 복이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부모를 기억하는 복된 자식과 그 자식들에 의해서 기억되어지는 복된 부모들만 있는 그런 어버이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