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1~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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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1~12)

유앙겔리온 2023. 4. 14. 22:36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12

눅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눅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눅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눅24: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눅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눅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눅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나 여인들이 죽은 자의 상징이며 죽은 자의 자리인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죽어 누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자를 위한 물품들을 준비해서 무덤에 갔으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이미 옮겨졌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심히 당황해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까지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리라고는 기대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정과 연민의 마음으로 죽은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당연히 누어 있어야 할 주님의 몸이 없으니 허둥지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절에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인공이 부활을 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찾지 못하자 이 일로 인하여 도리어 근심하고 당황해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녀들에게 들여온 음성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찌하여’ 로 번역된 헬라어 ‘티’는 ‘왜’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왜 찾고 있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예정된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왜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있는 이를 찾느냐 하신 책망의 소리인 것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을 찾아야 할 곳에서 찾지 아니하고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 뿐이겠습니까? 이 여인들의 모습은 많은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많은 유대인들 중에는 메시야가 오면 다윗의 보좌에 다시 앉아서 유대의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런 예수를 기다리고 찾았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헤롯의 보좌 위에 앉아서 왕이 되실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 여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엉뚱한 일을 하는 이들은 여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찾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고 무덤에 누워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기록된 성경속에서만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없이 예수와 아무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사교나, 정서적인 안정이나, !취미생활쯤으로생각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죽어 있는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산자는 산 자의 자리에 머물고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자리에 머뭅니다. 

  우리의 자리는 산 자의 자리입니다. 산 자의 자리에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과 그들에 의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이 어떤 단계를 거쳐 부활의 증인으로 다듬어져가게 되었습니까? 

  천사들의 제언,
  6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기념관 이름이 "야드 바쉠(Yad Vashem)입니다. '야드'는 '기억'이라는 뜻이고 '바쉠'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명의 한 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념관 출구쪽에는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이끌고 기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성경은 '기억하라'로 시작해서 기억하라로 끝나는 책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그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들과 제자들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면 죽은 자를 위한 물품을 챙겨 빈무덤으로 올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하여 물품을 준비해서 갈릴리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또 믿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덤에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일찍 부활하셔서 갈릴리에 가 계시는데 여인들은 무덤에서 주님을 찼았습니다. 동문서답을 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약속의 갈릴리에서 찾지 않고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들은 천사들의 책망과 안내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머리에 굼밤을 먹이고서는 빈무덤을 속히 떠났던 것입니다. 

  8~9절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여인들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에게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믿으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빈무덤 사건의 중심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오셨고, 말씀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이 되셨으며, 말씀대로 사흘만에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이들에게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말씀의 사람이 세상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믿음의 나그네 길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빈무덤을 찾고 빈 무덤 그곳에 머물러 있어도 그들을 주의 제자로, 주님에게 속한 사람들로 세상은 여겨줄 수도 있고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더 달콤하고 그것이 더 쉽고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씨없는 과일이, 땀흘리지 않고 오는 쾌락이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빈무덤, 시체가 누어 있는 곳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거닐고 사는 곳에, 씨고 있고, 땀을 흘려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하는 곳, 그곳 갈리리는 생명도 능력도 기쁨도 감사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