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위축되지 않는 인생(시 44:17~22) 본문
위축되지 않는 인생
시 44:17~22
시44: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시44: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시44: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시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시44: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위축되게 하는 것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축이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더욱 위축의 수위는 높아질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위축이 높아질수록 삶의 만족도는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성은 높아집니다. 그래서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위축되면 실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잘하던 일도 위축되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위축되게 만들어서 자기의 발 아래에 우리를 굴복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위축이 되면 악한 마귀 사단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위축을 부추기는 사단의 궤계를 물리쳐야 합니다. 히 10: 35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했습니다. 위축이 되면 담대함을 잃게 됩니다. 위축되지 않아야 담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을 얻도록 이끌게 됩니다. 위축이 낮아질수록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반대로 공격성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8절 중에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상황도 우리의 시대와 똑같이 이전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위축될 수 밖에 없은 상황에놓여 있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기소침하고 위축되어 기를 펴지 못할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17절에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과연 시편기자와 그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모든 일이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환란'이었습니다. 그 세세한 내용은 시편 44편 전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9절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11절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시고 우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셨나이다.'
12절 '헐값으로 파심이여'
14절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며'
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9절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는 결코 마음이 위축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런 때를 당하여도 내 마음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내 걸음이 주님의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환난을 당하면 마음이 위축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잘 가던 사람들도 그렇게 시험의 덫에 걸려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마음이 위축되지 않아야 합니다 .
위축될 수 있는 때에 위축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축되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움찔하여 뒷걸음치며 마치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담아내는 용어"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위축되다"는 말을 "퇴축되다"로 번역했었습니다. '물러나서 웅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난 비평에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에 up되고 비난에 down되는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위기라고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보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낙심케 하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인생은 내 뜻대로 만 되는 게 아닙니다.
일의 결과물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면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의 핍박과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이 이기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변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과 우리 앞에 주어진 일이 장애 앞에서 가로막힐 때 결코 위축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일을 만날지라도 위축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아십니다.
실수 좀 했다고 위축되지 않아야 합니다. 실수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무엘하 6장에 다윗이 실수한 일이 나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나오다가 웃사가 죽습니다. 그 법궤를 우선 오벧에돔의 집에 메어 간 후에, 3개월 정도 있다가, 그 다음에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갈 때는 신중과 기쁨의 모습으로 옮겨가지요. 한 번 실수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인도하기도 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판 실수로 인하여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실수는 가룟유다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제 역할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실수 했다고 위축되지 맙시다.
시편기자가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시편기자는 위기 때에 시 44:6~8절에 보면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했습니다.
그러니 위축을 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을 의지하여 인생의 길을 달려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심은 하되 위축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퇴축되지는 않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위축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위축당해서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리고, 괜시리 공격적이 되어서 더 나쁜 상황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인해서 위축이 낮아지도록 함으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