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터가 무너지면(시 11:3~4) 본문
터가 무너지면
시 11:3~4
시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인생은 터를 잡고 사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터를 잡고 터를 마련하는 일에 신중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일지라도 그 터가 견고한 터가 되도록 다지고 또 다집니다.
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터는 집이나 건축물을 지을 자리를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이나 사회가 기반으로 삼아야 할 토대나 기초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터의 의미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기초가 되는 원칙, 가치관이고 세계관이고 인생관이고 신앙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 교회사, 일반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운대로 이런 터들, 이런 기본들이 무너지면 그것이 받치고 있는 상부구조는 만드시 무너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구축하고 만든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믿고 있던 터가 무너질 때, 우리는 몹시 혼란스럽게 되고 삶을 지탱할 힘을 상실하는 위기를 체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듣든한?토대를?쌓고,?그?위에?아름다운?것을 세운다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던 순수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최소한?이것만큼은?안전하다고?생각했던?것들이?사정없이 무너져내리는?경험들을 이제 우리들은 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안전한 터는 이 세상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터는 무너질 것입니다. 상업의 터도 무너집니다. 일년이면 수 없이 많은 회사가 무너집니다. 권력의 터도 무너집니다. 재물의 터도 무너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의의 터도 무너집니다. 그 무너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옛날에는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나 지금은 순식간에 강산이 변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가장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두말 것 없이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입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산 사람들,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터를 의지하고 터를 신뢰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집을 지어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지탱하는 기반은 무엇입니까? 의인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악인은 버리시므로 망한다는 토대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을 받을 때, 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여기서 신앙생활의 의욕을 잃게 되고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인물인 욥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삶을 사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신앙의 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터가 무너졌습니다. 무너져도 적당히 무너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그 무너짐이 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축복을 잃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잃었습니다. 자녀들도 다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이제는 살았다할 것이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의인의 삶을 살아온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역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그 삶의 터가 흔들리는 것을 겪었습니까?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인생의 터가 무너지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주의 일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살았던 그였지만, 그의 삶의 터가 얼마나 흔들렸습니까?
우리가 평안할 때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더우기 악인들은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통촉하시지 않고, 감찰하시지 않기 때문에 저런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다고 조롱합니다.
이럴 때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다른 수단을 강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게 됩니다.
터가 무너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런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터가 무너지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 선택에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11:3절 말씀처럼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이 질문은 오늘 누군가에게 주어진 질문일수도 있을 것이고,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우리에게 던져질 질문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될 때, 한결같이 닥쳐오는 것은 "미혹하는 영"이 우리로 하여금 "저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는 미혹일일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두가지 대안적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낙망하며 지켜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터라는 것 자체를 세우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터가 비록 무너질찌라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터가 우리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관계된 모든 터가 무너질 때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터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터로 삼는 자들의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4절을 한번 보세요. "여호와 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터가 무너졌을 때 의인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터가 무너져도 여전히 해야 할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그의 성전에 계시며, 그의 하늘 보좌는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그 보좌에서 그 안목이 저희를 통촉하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촉하고 감찰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통촉은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시는 것을 말하며, 감찰하신다는 말씀은 시험하고 연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촉해서 아시고 시험하시고 연단해서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터가 무너졌을 때에 통촉하시며 감찰하십니다. 그렇게 통촉하시고 감찰하셔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날이 오도록 하십니다. 그 때, 실리만을 쫓아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은 부끄러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터가무너지는 것과 같은 경우에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피하여 하나님을 터로 삼고 믿음을 지킨이들을 영화롭게 하실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터가 견고할 때뿐 아니라 환난날에 우리의 피난처시요 터가 무너질 때에도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세상만사의 터, 인생의 터는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터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겪었던 터가 무너져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미혹에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의인으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치는 영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로 인하여 이 세상은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세상과 함께 무너질 터가 아닌 믿음의 더 낫고 더 좋은 터를 만들어가야 함을 교훈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