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낯선 하나님(욥 19:25~27) 본문
낯선 하나님
욥 19:25~27
욥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인생살면서 종종 낯선 경험을 해보지 않는 분들은 아마도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낯선 것을 경험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낯선 것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낯선 것은 누가 뭐래도 낯선 것입니다. 아이들은 낯선 것 앞에서 놀라고 울어댑니다. 청소년들은 낯선 것 앞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걸어버거나 반대로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어른들은 낯선 것 앞에서는 긴장하고 불편해 합니다.
대체로 낯선 것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분위기나 환경이나 그 어떤 것이나 좋은 것이 못됩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낯설지 않기 위해서 언어, 문화, 사람, 기술 등등을 미리 익히려고 무던히 힘을 씁니다.
욥은 자신이 환란을 당했을 때,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 이웃, 친구들, 즉 자신이 귀하게 여기며 친근히 하여 낯을 익혔던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처럼 자신을 대하는 것을 겪습니다. 그래서 낯설음이란게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은 사람들은 그러하다할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낯설지 않는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만은 낯설지 않는 하나님이시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대속자로 바라보고 의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을 낯선 하나님으로 돌려 놓으시면 안 됩니다. 욥은 모든 것이 다 자신과 낯선 것이 될지라도 하나님은 낯설지 않는 하나님으로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나는 "육체의 가죽을 입고 있을 때에나 벗은 후에도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낯설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낯설지 않는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 수 있습니까? 욥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전 13:12절에서 사도바울은 "이전에 희미하게 보았던 것을 이제 후로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내가 온전히 알리라"했습니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친밀하시던 하나님께서 어느날엔 낯선 하나님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주시거나 요구하실 때 당황스럽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기다리던 복은 오지 않고 환란이 닥쳐 왔을 때, 광명을 바랬으나 흑암이 왔을 때,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하나님은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신 아들을 다짜고짜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뻔히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식인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참 낯선 하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면서 잘 살고 있던 모세를 어르고 달래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끌자로 겨우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장인 이드로의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광야길에서 그의 자식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그를 죽이고자 했던 낯선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후수아에게 견고한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바퀴씩 돌라 하시고 제 7일에는 일곱바퀴 돌라 하실 때는 정말 낯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나에게 적국인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하고 구원 얻으라 외치라고 하셨을 때 정말 낯설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딸자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던 수로보니게 여인를 대하시는 예수님은 정말 낯설기 짝이 없는 주님이셨습니다.
상당한 식견을 가진 헬라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짤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했을 때 그 인자하시던 주님께서 "자녀로 배불리 먹게할지니 자녀의 떡윽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셨을 때 알마나 낯설게 느껴졌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낯선 하나님을 극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어가자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인류 역사에도 낯선 하나님의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금번 우리가 경험한 코로나 상황에서도 어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하나님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낯설지 않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성경의 사람들이었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믿음의 역사는 이어져 가는 것이고 역사는 진보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낯선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광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기에는 역부족이겠지요.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실 때, 낯선 아버지 하나님을 직면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얼마나 낯설었으면 하나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낯선 것은 기분 나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도망치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낯설지 않게 적응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놀랄만한 변화에는 낯선 것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낯선 하나님으로 느껴지지 않토록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옵소서. 만약에 낯선 하나님으로 느껴지고 생각될 때에도 하나님과 친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시옵소서"
만약의 친밀하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낯선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선 하나님을 통해서 더 친밀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기회를 체험적인 신앙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이 아니고서는 "낯선 하나님"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영적 체험을 늘려가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낯선 하나님이 아닌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교제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경험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낯선 모습에 기겁을 하고, 아기처럼 울고, 믿음없는 사람들처럼 긴장하고 불편해하면 우리는 신앙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에 오늘 본문에서 욥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고백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