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본문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바꾸어보고 싶다면 가장 손쉽고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 감사는 감사의 생활화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좋으나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주어진 것이 있고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과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 얼마든지 불평할 수도 있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결과물을 낳게 되고 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선택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선택을 권하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느냐?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는 당위성, 당연성을 말씀하십니다. 왜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했습니다. 불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믿음의 백성들은 인간의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면 그 뜻 가운데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서 감사를 느끼기 시작하고 감사를 말하는 순간부터 더 좋은 많은 일들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하기'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지치도 않고 불만꺼리를 찾아서 불평하는데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이 많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서 그 마음 중심 속에 감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항상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할 일에도 불평을 하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할 일도 감사합니다. 불평의 반대말은 감사입니다.
불평은 문제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불평은 스스로를 늘 억울하고 화나는 '상황의 피해자'로 만들 뿐입니다. 그 때문에 늘 되는 일이 없이 느껴지고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불평을 끌어드리게 됩니다.
민 14: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영웅들인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절대다수가 불평스러운 보고를 했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사건 자체를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 악평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을 되돌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지경에까지 몰아갔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지만 불평에 길들여진 출애굽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의 조건을 찾아냅니다. 엄살을 부립니다. 그리고 불평할 사람 이리 붙어라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높이 쳐듭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말하는 것을 내가 들으시는 대로 행하시겠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불평하면서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불평하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용서를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은 불순종과 불신앙과 적대감과 미움을 가지게 합니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생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감사를 훈련하는 교본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이 하나를 훈련하시기 위해서 그토록 애쓰시는 하나님의 쉬지 않고 일하심을 담고 있는 것이 성경일 것입니다.
불평은 전염성도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전염이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관심을 갖거나 그것들이 쉽게 몸에 습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불평을 들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까이 하고 불평 하나라도 더 들어주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불평제조기들은 불평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불평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좋은 마음으로 그것을 들어주던 자신도 어느새 그 불평의 독에 중독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신도 어느새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고 심리상태에서부터 시작해서 육신까지 피로에 지치게 되고 감사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평 많은 사람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멀리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불평은 정말 대단히 위험한 악습입니다. 불평은 다툼을 일으키고 관계를 망가 뜨리게 합니다. 불평 속에 이해와 사랑은 결코 싹트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사슬과 고리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순환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불평이 아닌 감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강아지가 고기 한 덩어리를 놓고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마침 꾀 많은 원숭이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참견했습니다.
"내가 공평하게 나눠주는 건 어때?"
강아지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원숭이에게 고깃덩어리를 가져다주었고 원숭이는 일부러 한 덩어리는 작게, 한 덩어리는 크게 나누었습니다. 작은 것을 받은 강아지는 자기 것이 훨씬 작다고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는 큰 쪽을 다시 받아서 들고는 한 조각을 베어 먹었습니다.
"자 이러면 둘이 똑같지?"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강아지가 원숭이가 한 입을 베어 먹은 부분 때문에 자신의 고기가 더 작다며 불평했습니다. 원숭이는 또 다른 고깃덩어리를 한 입 베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계속하고 나니 남은 것은 작은 고기 한 점이었습니다. 그제야 강아지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후회했습니다.
성도의 불평은 이처럼 마귀로 살찌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불평은 만악의 근원이요 불신의 전형입니다. 불평하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고 오히려 진노가 임합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거나 비난을 멈춰야 하며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지금부터 '불평그만, 범사감사' 첼린지를 시작해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