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시 122:6) 본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시 122:6
찬 26, 210, 1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시편 122편은 구약시대에 이곳 저곳 흩어져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길 절기를 맞아서 여호와의 집 곧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올라간다는 것은 예루살렘 시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길을 걸어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농사 지을 때나 힘들 때 '노동요'를 불렀습니다. 군인들은 서로 단결하고 힘을 돋우기 위하여 '군가'를 부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열심에 불을 붙였고, 격려와 위로 소망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호와의 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들이 놓쳐서는 안 될 일, 꼭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려고 그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까?
그 이유 중에 두 가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평안을 구해야 하고 사랑해야 할 예루살렘은 무엇이며 또한 어디이겠습니까?
과연 성서의 땅. 이스라엘의 옛날 수도인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나 장소적으로만 지칭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노래한 예루살렘은 당연히 성서의 땅 이스라엘의 옛수도를 가르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이스라엘의 예표이며 준비이며 모형이며 그림자인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평안을 빌고, 사랑하는 것은 새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가 섬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 우리의 신앙 고백 위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가 바로 우리의 예루살렘입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공동체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즉 오늘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우리 한광에 속한 영적가족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 이 공동체를 위해서 평안을 빌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한광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진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깊숙히 녹아 들어간 곳입니다.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형성되는 곳입니다.
적어도 32년 동안 우리 한광의 식구들이 눈물을 흘려 그 자국이 형성된 곳이고, 단을 쌓고 쌓아서 하늘길을 마련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올라오는 모든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의 평안을 구하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선지자는 렘 29:7절에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잔잔해야 여러분의 삶도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안전할 때 우리의 삶도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평안을 도모해야 하고 또한 힘써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와 불편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을 사랑하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이 피흘려 세우시고, 그것을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진심과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냥 불편한 것 싫으니까 침묵하고, 피해가고,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서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면 몸의 평안을 위하여야 하고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체인 자신도 평안을 얻고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하고도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의 신앙이 과연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내가 은혜받으려고 올라가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가 없는 곳이라면,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상실된 곳이어서 도저히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할 수 없고 예루살렘을 사랑할 수없다면 우리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울 것입니다.
이런 예루살렘과 같은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다닌다면 다닐수록 예배 시간이 빨리 끝나 얼른 집에 가고 싶고 봉사하는 것들이 힘들고 지쳐가는 심령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삼위일체란 신학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교부 터툴리안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서 힘쓰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루살렘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실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서 간구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형통하리로다"했습니다.
'형통하다'는 말 '솨라 또는 솨라브'는 ‘잔잔하다’, 즉 ‘안전하거나 성공적인’ 것을 말합니다. '행복하다, 번창하다, 안전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잔잔함을 주십니다. 안전하게 하시고 그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이 되게 해주십니다. 행복하게 하시며 번창하게 하시며 안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빈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치사를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주님의 몸입니다.
교회의 평안을 힘쓰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쇠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형통함의 복을 베풀어 주실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