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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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사 41:10)

유앙겔리온 2022. 10. 4. 22:51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사 41:10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폴레온 힐'이라는 사람은 그의 저서 "성공학 노트"(The Law of Sucess)라는 책에서 인류의 여섯 가지 기본 공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나서 기본적으로 여섯 가지 종류의 기본공포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첫째 가난에 대한 공포, 둘째 노쇠에 대한 공포, 셋째 비판에 대한 공포, 넷째 실연에 대한 공포, 다섯째 질병에 대한 공포, 여섯 번째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살아가면서 느끼는 공포가 어디 이 여섯가지뿐이겠습니까? 성경에 언급된 '공포'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런 말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도 많습니다. 

  이렇듯 신구약 성경에 '공포'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인간의 심리 가운데 공포가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5%의 사실과 95%의 반응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힘들게 여겨지는 문제일지라도 그 문제의 실체는 5%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95% 는 내가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5%의 공포스러운 운명에 넘어지지 않고 95%의 반응으로 인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공포'를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성경은 공포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포로 인해서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공포라는 사고구조를 갖게 되면 어떤 것에나 공포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포(恐怖)'라는 말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서 꺼리거나 무섭게 생각하여 떠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워하고 놀라는 공포는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과 관계 있습니다. 자기 이익이 침해를 당하면 맨붕에 빠지고 패닉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사람이 공포를 느끼게 되면 이유도 없이 호흡이 곤란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긴장하게 됩니다. 심해지면 떨리고, 가슴에 조여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나 통증까지 느끼게 됩니다. 땀이 비오듯 나고, 현기증이 생기고, 기절할 것만 같고, 뱃 속이 거북하고, 몸이 저리고, 차갑거나 달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미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미칠 것만 같은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공포에 노출되면 또 다른 심리적인 증상들이 나타는데 그것은 의심이나 교만, 열등감, 우유부단, 미신을 따르거나 우상숭배, 비겁함, 의기소침, 염려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공포는 공포를 낳고 온갖 공포의 환상에 사로잡혀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킵니다.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포와 싸울 것이 아닙니다. 공포와 싸울려고 하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또다른 공포까지 깨우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놀라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그것들이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면, 공포가 공포를 몰고 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두려워 하고 놀람에 떨어지는 것은 사단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동의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누리가 동의해 주지 않으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놀램은 마귀로 하여금 우리 마음과 생활과 환경 속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욥은 욥 3장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고백했습니다.

   두려움과 노람을 허용하면 내 영혼의 뜨거운 불은 꺼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러움과 놀램에 빠질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의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결같이 공포에서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공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공포의 정서나 감정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늘 느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언제라도 공포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공포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의 신앙적인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포가 여러분을 포로로 잡을 것입니다. 믿음을 잃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 안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것은 공포입니다.  

  시 26: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다"하셨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라는 말은  히브리말에 '예체르싸무크'라는 말인데 이는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바람이 불어 올지라도, 어떠한  병마가 나를 덮칠지라도, 남에게  이유없는 상처와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상황에 절대로 개의치 않도록 나의 마음을  완전하게 고정시켜 놓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굳게 잡고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다윗은 시편 56편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 "바타흐"라고 하는 이 동사는 "어디에 꼭 매어 달리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착 달라붙어 안겨 있는 것과 같이, 어떤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를 완전히 의지하여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확실하게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날을 피하고 놀라는 일을 피하는 길입니다. 

  내가 공포에 치를 떨고 있을 때에, 내가 두려운 날에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굳세게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