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가인같이 하지 말라(요한일서 3:11~12) 본문
가인같이 하지 말라
요한일서 3:11~12
찬 15, 220
오늘 주시는 본문 말씀은 사랑의 사도 요한이 '가인'이라는 구약적 인물을 샘플(sample)로 들어 "사랑 없는 인생의 비참함"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을 생각해 보면서 역(逆)으로 사랑을 생각해 보는, 뒤집어보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가인이 한 일이 무엇이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가인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가인은 그 아우 아벨을 무참히 죽인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가족살인을 했던 비정한 인물입니다.
가정에서 가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이만큼 크고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추석명절 연휴를 맞이하여 복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성도들의 가정에 복된 일들만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어느 가정이든 어느 집이든 크고 작은 문제들이 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이 없을 때 그 문제는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불행한 일들을 만들어내고 마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인 첫번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악한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가인된 이유,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모델입니다. 악한 자에게 속하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이 살인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악한 자에게 속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악한 자, 악한 영, 악한 것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에 속하여 있으면, 악령에 속하여 있으면, 세상에 속하여 있으면 가인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사랑의 영, 살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한 영,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있었습니다. 인생이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악한 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영이 아닌 사탄의 영향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며 살자!"는 결단성 구호로 해결되는 의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연습을 많이 한다고, 성품이 좋다고, 수련을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일 것이나 항구적으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에 속하여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면 체질적으로 악한 것 맞지 않습니다. 성령이 다스리는 영역에 머물러 있으면 의당히 사랑하게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매돌을 던져 쓰러뜨린 것을 본?사울왕은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수하에 두고 가족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자기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자 사울의 마음에 미움이 들어갔고, 악한 영이 그를 사로잡아 시기하여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일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를 깨닫고 뉘우치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여러번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짐과 맹세는 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왕의 결과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죄의 종된 인간이라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수양으로, 교양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의 심중을 확인하고서는 사울의 곁을 떠나 어디로 갔습니까?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피신을 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군사를 "라마 나욧"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군사들에게?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였고 돌아오지 않음으로?또 다시 두 번 더 다른 군사들을 보냈으나 동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라마 나욧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울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라마 나욧에 들어섰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여서 걸어가며 예언을 하고,?옷을 벗은 채로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워 있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라마 나욧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마 나욧의 세계 밖에서는 육신이 왕 노릇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무엘과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마 나욧의 세계속으로 들어온 이들은 그가 누구든지 육신의 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언하고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새 사람이 된 것은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고 훈련해서 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먹었다고 된 것도 아니고, 의지를 불태웠다고 된 것이 아니고 단지 라마 나욧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왕도 한 때는 하나님의 영의 속하여 그의 지배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멋진 일꾼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통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남으로 사울은 번뇌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 염려와 두려움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사람들을 죽이려는 악한 일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라마 나욧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고, 더 이상 욕망에 이끌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이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가인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속에서 산다고 하면 가인처럼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두번째 이유는 역시 12절 "......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악한 자에게 속한 자의 두번째 특징이기도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으로 그 행위가 의로운 자였으며 사랑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행위가 악한자였으며 미움으로 살았습니다.
악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러러보며 모방하고 선한 경쟁을 해야 할 것에 대해 오히려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아우 아벨의 행위가 의로움으로 그가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면 "나도 아벨처럼 해야 되겠구나"하고 우러러 보고, 모방하고, 카피하고, 닮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절대기준인 저 선한 것을 죽여 없앰으로써 자기의 악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있으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면, 악한 힘에 사로잡혀 있면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곁에 사람을 잘 둬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에 속하여 있어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악한 자에게 속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속한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속한자, 천국에 속한자, 선한 영이신 성령에 속하여 그의 지배를 받고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라마 나욧의 지경 안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자신보다 가족과 이웃의 의로움을 만났을 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그런 일을 만났을 때에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증오하기보다는 오히려 귀중히 여기고 자신을 고쳐가는 삶을 사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