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벧전 2:1~3) 본문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벧전 2:1~3
찬 90, 325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미친바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오늘도 찬양하고 감사하며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인 우리에게 있어서 오늘이라는 삶의 기회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분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버리라, 사모하라, 그리하면 자라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말씀 주신것일까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성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거나,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성장과 성숙으로 직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에는 반드시 의도적으로 주어지고 공급되어져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여기에 일가견이 있는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자주 넘어지고. 베드로처럼 자주 실패하고 베드로처럼 자주 침체에 빠졌던 제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신앙성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의 선하심을 맛본 영적인 새 생명들이 멋지게 자라가기 위하서는 첫째는 버러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모든 악독, 모든 기만, 모든 외식, 모든 시기, 모든 비방"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발동할 때면 여지없이 영적 실패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어다 보면 틀림없이 이런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야 말로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인격과 믿음이 자랄 수 있고 심령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우리의 신앙은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버려야만 채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버리는 것이 더 깊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과수원이나 정원에서는 좋은 나무를 만들기 위해서 봄이 오기전에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일을 합니다. 일명 가지치기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가지, 병든가지 잘못 자란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가지를 버리는 일은 나무에게는 아품일수도 있겠지만 가지치기는 나무의 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가지를 잘라내는 아픔을 딛고서 나무는 모양을 갖추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인생도 가지치기의 아픔이 있을 때 더 성숙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나무의 가지치기의 아픔 뒤에는 성장이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버리는 일에 인색하면 안됩니다. 끊임없이 옛것을 버리고 나와야 합니다. 잘못된 것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교와 성전종교에서 나왔던 것처럼, 루터와 칼뱅과 개혁자들이 구교에서 나왔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적인 교회는 나쁜것은 버리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영적인 새 생명들이 자라가기 위하서는 둘째로 해야할 것은 "사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결코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그 젖을 부지런히 섭취해야 됩니다. 먹는 젖에 의해서 건강과 성장이 결정됩니다.
건강한 아이는 젖을 무척 사모합니다. 끊임없이 엄마의 젖을 찾습니다. 그러나 병든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려줘도 빨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젖이라고 해서 다 동일한 젖이 아니며 다 좋은 젖이 아닙니다. 아이에게 먹이는 젖이 만약의 경우 상하고 변질된 것이라면 생명이 자라기는 커녕 잘못하다가는 생명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고, 만약 기적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있기는 하지만 생명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은 하지 못하는 온가족들에게 전적인 부담만 되는 그런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린아이 역시 자동으로 영적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잘 먹음으로 인해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의 영적 생명은 자라지 않습니다.
영적 어린아이가 믿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말씀의 젖을 먹어야 합니다. 단순히 육적으로 배부르고, 형통하고, 이 세상에서나 필요한 것들만을 얻기 위해 말씀을 먹으려고 하는 욕망으로는 결코 거룩한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버릴 것은 아낌없이 온전히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부지런히 찾고 먹으면, 우리 주의 선하심 맛본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셋째,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b)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되고 거듭난 것 그것만으로는 신앙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 이후가 중요합니다. 그 이후는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배설을 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젖을 빠는 것은 자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고도 계속 갓난아기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재앙이요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버리고 사모하며 먹었다면 자라야 합니다.
나는 자라고 있습니까? 나는 변하고 있습니까?
영적 자람을 위해 베드로가 제시하는 말씀의 법칙은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먼저 '버리고' 잘 자라는데 양분이 되는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그 신령한 적을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신앙이 자라는 영적 성숙이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