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본문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사도를 통해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로마옥중에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옥중 편지의 내용 중에 일부분입니다. 즉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 누구에게도 마귀가 틈을 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이 틈을 내주지 않으면 결코 마귀가 틈을 탈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틈'이라는 말은 "신이나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가 벌어져서 사이가 생긴 자리" 또는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를 말합니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틈'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틈이 생기면 무너지고 파괴되고 해체되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틈을 찾는 마귀가 군대처럼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하신 것입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이 말씀을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마귀들은 우리 심령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려고 항상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어두움 가운데 웅크리고서는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의 사회 속에 발붙일 기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상륙거점을 주지말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시고 지으신 사람에게 제일 먼저 가정을 선물해주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복음의 시작과 함께 교회를 제일 먼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을 엮어가야 축복이 축복일 수 있고 행복이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처음부터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가정과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틈만있으면, 틈이 없으면 틈을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가정들이 무너졌고, 교회들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러한 역사의 토대에서 무가정, 무교회주의가 팽배해져 가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정이 부정당하고 교회가 부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가정과 교회가 망가져서는 안됩니다. 이제 더 이상 육적가족이나 영적 가족이 소홀리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대적 마귀를 "굶주림 때문에 우는 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했습니다. 굶주린 사자는 배를 체워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이런 굶주린 사자가 어떤 짐승을 먹잇감으로 정할까요? 무리 중에 떨어져 있거나 약해서 틈을 벌리기 좋은 짐승을 공격합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틈을 엿볼뿐만 아니라 직접 틈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마귀를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디아(between)와 볼로스(throw)의 합성어입니다. 디아는 사이(between)라는 말이며, 볼로스는 던진다(throw)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던져서 나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귀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모든 관계의 불화가 일어나는 그 배후에는 바로 이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의 불화, 부모와 자식간의 불화, 교인간의 불화, 민족간의 불화 이런 모든 불화의 뿌리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틈을 좋아합니다. 마귀는 틈을 만들고 틈을 벌리고 틈을 이용합니다. 조그마한 감정의 틈, 방심의 틈, 교만의 틈을 타 무너뜨리는 것이 사탄의 계책입니다. 마귀는 아주 작은 틈만 보여도 우리의 심령 속에 스물스물 냄세처럼 기울들어고 파고듭니다. 우리 가정 속에 우리들이 속한 교회 안에 들어와 파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듭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궤계를 알고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면서 창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틈이 있어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방주는 침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어떤 틈을 노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상한 감정의 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현대인을 파멸시키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화(禍,anger)'와 '음란(淫亂)'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는 이 두 기둥에 붙어 자라는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엡 4:26~27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감정 중에서도 분노의 감정이 가장 마귀가 틈타기 좋은 감정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귀가 상륙할 수 있는 거점을 내어주는 것이 됩니다. 섭섭한 감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로 산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이 상할 때, 즉 분노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감정이 격해질 때가 가장 취약한 때입니다. 마귀는 이 때를 노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분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범죄함이 분냄에서부터 연유하고 있는 것도 그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엡 4:31)며 거듭 분을 품지 말고 버릴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분내는 것은 마귀에게 틈탈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진입로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거점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마귀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극도로 격해지거나 지나치게 슬플 때는 절제해야 합니다. 마귀는 그런 격한 감정이나 상처를 통해서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겠거든 마귀가 틈탔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시험의 틈을 주지 않는 최선의 길입니다.
분한 마음, 악한 마음을 내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으면 이것들이 나의 육신과 영혼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나를 망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어 나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내가 누군가를 미워해 보면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보다 미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더 많은 면에서 손해를 봅니다. 마귀로 틈타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주님께 착실하고 확실하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면 마귀가 공격할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므로 주님과 우리가 온전히 연합하여 한 몸, 한 생명, 하나 되어 주님의 생명으로 살며 주님으로 사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먼 곳이나 높은 이나 대단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살전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 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우리의 심령, 가정 그리고 교회의 틈을 기워버리면 사탄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틈이 생길 때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주님의 이름으로 틈을 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틈을 기워주소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시60: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틈을 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분명히 들어올 틈, 들어올 사이, 들어올 기회가 있어야 들어오고, 있을 만한 조건이 되야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별의 순간이 오게 됩니다. 아내, 남편, 부모, 형제, 자녀의 죽음은 살면서 겪어야 할 가장 큰 고통임엔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인생을 마감하면서 가족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세상을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이별 앞에 '좀 더 사랑하며 살걸'이라며 후회하지 말고, '그래도 마음껏 사랑해서 다행이다'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금주 한 주간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