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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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린아이들을 안고(막 10:13~16)

유앙겔리온 2022. 5. 10. 13:30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막 10:13~16
    
막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이 행복하기를 기도하면서 어린이주일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마 23:37-39절 에서 "새끼를 모으는 암탉"의 비유를 통해서 새끼에 대한 집착이 강한 암탉을 모델로 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과 그 분의 심정을 말씀해 주신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의 모습과 주님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새끼를 모으는 암탉을 통해서 나타내보여 주셨습니다.  
    
  병아리는 연약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자기의 주제를 알고 조심을 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병아리는 호기심도 많아 이것 저것 가리지를 않고 덤벼들기도 하고 제 마음대로 이리저리로 종종거리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독수리나 만나고 매나 족제비와 같은 것을 만나면 영락없이 그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함정에라도 빠지면 결국 그 속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다고는 하나 아직 자라지 않아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다리도 짧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닭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속이 터지지만 병아리에게 주의를 주고 병아리를 모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암탉은 결국 위험이 닥칠 때면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병아리를 결사적으로 보호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 이와같음을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즉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아 품은 암탉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비유"로 말씀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등떠밀며 예수님께 보냈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 부모와 그 아이들을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귀찮다고, “아이들은 가라”며 내쫓고 금한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데리고 왔다”(헬, 프로습훼로)는 원어상 문법적 표현은, 계속 해서 데리고 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바쁜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자꾸 예수님 품으로 밀어넣은 그 부모들과 눈치 없이 예수님의 품안으로 달려 들어가 안기는 아이들이 귀찮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었겠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그들을 꾸짖고 금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행동 밑바탕에는 습관적으로 몸에 배인 어린아이에 대해 경시풍조가 깔려 있음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아마도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이렇게 차단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 잔치를 하고 계신데 어린아이들은 말씀잔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없어서 금방 산만해집니다. 그러니 방해거리라 생각할 수 있었던것입니다.

  혹 우리 한국교회의 유아실 운영이나,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 등을 분리하여 예배하는 것이 또래 집단끼리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그들의 연령에 적정한 수준의 예배를 드리게 하고 교제권을 확보해주고자 하는 배려로 마춤형 예배를 드리도록 한 것 뿐입니까? 혹 장년들의 예배가 방해를 받을까봐 그렇게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젠 어린아이들을 어른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존재쯤으로 생각하는 그런 태도를 버리셔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유아실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는 그런 각층의 분리가 없었습니다. 누구여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더욱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노하신 것입니다. 
    
  여기 "노하셨다"는 표현은 원어상으로 보면 “매우 화가 났다(헬, 아가낙테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아가낙테오'의 어두인 '아간;은 ‘매우 또는 많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글 번역 보다는 훨씬 강도가 쎄게 화가 나신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화가 많이 나셔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셨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또한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는 말씀은 "풀어놓아라, 통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몰라서 풀어놓고 통제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시면서도 불구하고 풀어놓고 통제하지 아니하면 위험할지라도 풀어놓고 통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천국잔치에서 만큼은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안수하여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곳에서는 그들을 통제하거나 묶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이나 어린이 날이면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하는 조부모님들, 그리고 부모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내 자녀손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는 오늘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손을 이끌어서 예수님에게까지 데리고 나아가는 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학원이나 학교나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어떤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보다 예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이 소란할 정도로 그 부모들이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 아이들을 떠밀어 놓았을 때, 그 어린아이들을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따뜻하게 품은 것처럼 그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정의 아이들 모두를 오늘 예수님이 만져 주시고, 예수님이 안아 주시고,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고, 예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세상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사건사고들이 끊임없이 그 비율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을 암탉의 역할을 할 그런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따뜻하게 품듯이 품을 수 있는 암탉의 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암탉의 날개를 가진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암탉의 날개 아래는 포근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안전하고 따뜻하고 온화합니다. 병아리는 언젠가 자라서 훌륭한 암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