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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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우개(마 26:69~75)

유앙겔리온 2022. 4. 20. 21:09

영적 지우개
마 26:69~75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금주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은 예수님께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이어지는 주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낮아지심의 최고 절정의 한 주간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첫 종려주일이랄 수 있는 이날에 구약성경에서 예언한대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슥9:9). 이렇게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어떤 이는 나귀 새끼를 풀어 드리고, 어떤이는 자기들의 겉옷을 드려 길가에 펴거나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았습니다. 어떤이는 종려나무가지를 꺾어서 흔들어 드렸습니다. 

  이렇게 입성하신 주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열매 없는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시며 제자들을 실수하지않도록 주의를 주시며 단돌이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실수가 아닌 오롯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예수님의 수난이 진행되기를 얼마나 바라셨겠습니까만은 사건은 그렇게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고, 제자들의 대부분은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히 쫓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런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의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악과 실수가 있었지만 이것을 지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지울 은혜가 믿음 안에는 있습니다.  

  뉴욕대학교에서 '가상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더그라스 라시코프(Douglas Rushkoff)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잘못된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지우개'라고 말했습니다. 지우개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과학도, 역사도, 도덕도 제자리걸음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인류가 발명한 놀랍고 획기적인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기, 통신, 비행기. 인공위성, 컴퓨터, 인공지능 그리고 의약품 등…… 그런데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사람이 하찮을 것 같은 지우개를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 지우개라고 하니 좀 의아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지우개를 인류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잘못 기록하고 그리린 것들을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그리는 도구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나 행동이 잘못되고 그릇 되었을 때에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데 그 중심점을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실수가 참 많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 할 수 있고 죄를 범할수있습니다. 그러나 뉘우치고 회개하면 다시 시작할 수있습니다. 

  실수의 뒤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에는 가설-실험에 바탕을 둔 발전이나, 짓고 허물면서 이어져 온 찬란한 문화나 문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실수를 지우고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에 실수를 교훈 삼아 더욱 발전된 모습을 이루게 되었음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참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본성품이 다혈질적이고 급하다보니 충동적이고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는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실수가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혈기를 잘 부리고 급하다보면 실수가 많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중에도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어떻게 호언장담했는지 사복음서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마 26:33절에서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막 14:31절에서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눅 22:33절에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요 13:37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제자들이 다 배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친다 할지라도, 자기는 죽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며 맹세까지 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잡히시자 베드로는 불안에 사로잡혔고, 호언장담한것과는 달리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베드로의 문제뿐이겠습니까? 우리들도 큰소리 치며 맹세해보지만 허망하게 실수를 하고 뼈아픈 아픔을 걲을 때가 어디 한두번이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실수를 미리 내다보시고 실수를 어떻게 지울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닭울음소리"와 매칭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죄악을 깨우치는 도구로 닭움음소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주님은 잡혀가시는 그 밤에도 이런 것을 다 준비해놓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무엇엔가 쫓기듯 실수를 한 것을 생각하고서는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베드로가 통곡한것은 단순히 눈물만흘린게 아닙니다. 통곡했다는 말은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와 함께 통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구약 히브리어로는 '슈브', 신약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두 단어 공히 '돌다' 즉 '방향을전환'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닭 울음 소리는 베드로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닭이라도 울어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입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신호로 해서 자신의 실수를 깨끗하게 문질러 지웠던 것입니다. 

  이 날 저녁에 실수한 사람이 베드로뿐이 아니었습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베드로와는 달리 예수님이 체포된 후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끝끝내 예수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지우개를 주셨습니다. ‘회개’라는 지우개입니다. 성경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지워주십니다. 

  사 1:18절에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아니하실만큼 깨끗하게 지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 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했습니다.   

  닭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팽계하지 말고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통회자복하라고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닭이 울지 않는 시대입니다. 닭이라도 울어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금번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순절, 그리고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닭울음소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수나 허물과 죄악를 철저하게 통회 자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영적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금주 한 주간의 영적 운동을 통해서 실수와 허물과 죄악은 그림자라도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남은 삶은 이전보다는 더욱 선한 삶을 사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