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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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할 줄 아는 사람(고전9:24-27)

유앙겔리온 2022. 3. 30. 21:43

절제할 줄 아는 사람
고전9:24-27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을 살아내는 이의 미덕 가운데 하나로 '절제'를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도들에게 사순절 기간 동안은 더욱 엄격한 절제 생활을 요구했습니다. '절제'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습관, 비기독교적이고 비신앙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절제하고 기도와 예배, 섬김과 봉사, 경건훈련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절제는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생활훈련이라고 생각됩니다.

  '절제'란 무엇입니까? 절제'의 사전적 의미는 '알맞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맞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지켜나가는 브레이크와도 같습니다. 속도를 조절하고 멈출 때를 알고 멈추는 능력입니다.  윤리학적으로는 '방종하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의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정결하여 우리의 행위를 알맞게 조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신앙생활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며 승리를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놓은 성령의 열매가 '절제'였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와 열매와 능력이 많아도 절제하지 못하면 덕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배열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경주자는 생활체육을 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차원과 같은 그런 경기자가 아닙니다. 단순히 경기에 참가하는 데 목적을 두는 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 경기는 그런 경기가 아닙니다. 상받기 위해서 달음질하는 경주이며, 여러번의 경주를 통해서 최고의 경기자를 뽑아서 세계적인 경기에 출전한 경주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기와 경주자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이기는 것이고 상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고 상받는 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덕목은 절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나누었던 영적 게으름에 빠지지 않토록 하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본다면 자신을 영적 게으름에 빠지도록 자신을 방치하는 것은 그릇된 자기 사랑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똑같은 자기 사랑이지만 절제는 옳바른 자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 아가면서 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는 것들은 별 재미가 없고, 힘들고, 지겹습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금지된 것들은 대부분 재미 있고 흥미진진하고 흥분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해야할 일은 버리고 해서는 안될 일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선택된 경기자는 재미 없고, 힘들고, 지겹지만 그것을 즐겁게 해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경기자의 본분입니다. 좋은 경기자, 이겨 상받기를 원하는 경기자는 재미 있고 흥미진진하고 흥분된 일에 대해서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다 하지 않습니다. 경기에 도움 되는 일이 아니면 모두 포기하고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생존과 발전과 번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코 인간의 욕망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사건과 교훈과 경구들을 통해서 절제를 가르치고 있고 권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온 사람들, 그리고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를 자주 묻곤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진맥진하여 절망하며 살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아무 욕망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소원을 두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욕망에 끌려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정도를 넘어가면 안됨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욕망 중에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에 절제를 배워하고 지켜야 합니다. 에드워드 웰치(Edward Welch) 교수가 "절제는 '조금만 더'와의 싸움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한번만 더' '1불만 더'그러다가 벗어나지 못합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먹고 마시는 것에는 한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한계를 지키기 못하면 오히려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헤치게 됩니다.

  경기자가 제일 먼저 겪어내야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대한 절제일 것입니다. 경기자처럼 육체적으로 왕성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운동량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니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그럼에도불구하고 가장 먼저, 가장 꾸준히 해야 할 절제입니다. 

  경기자들은 자기 몸에 밴 습관이 있습니다. 습관은 얼마나 많은 반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경주를 위해서 방해거리가 되는 것이라면 그 습관조차도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기자는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기에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사단은 이것을 부추겨서 그 힘을 경기가 아닌 것에 쓰도록 유혹할 것입니다. 그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경기자는 모든 것을 경기를 기준삼고 살아야 합니다. 경기 아닌 것은 비워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적 문화와 비신앙적인 문화에 대한 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절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이러한 절제가 가능해집니까? 참고 견딘다고 다 해결되는 것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보다, 습관에 빠지는 것보다, 비기독교적인 문화와 비신앙적인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뜨거울 때 가능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몇십년전만 해도 욕망을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꺼리낌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자신의 도가 넘는 욕망을 다 들어내는 것을 솔직한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설가 이외수는 대한민국을 "욕망공화국"이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욕망에 있고, 모든 권력은 욕망에서 나온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욕망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참혹한 고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결국은 고통으로 돌려 받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지 않기, 자기 습관대로 자기 감정대로 살지 않기, 믿음의 경주에 합당하지 하지 않는 것들에 젖어살거나 지나치게 빠지지 않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전염질환으로 외출 절제, 만남 절제, 여행 절제, 하고 싶은 일을 다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절제하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억지로 절제훈련을 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에 예수님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절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한걸음 한걸음은 절제의 걸음이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절제를 실천해 나가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