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현의 살림운동
영적 게으름을 피하라(잠언 26:13~16) 본문
영적 게으름을 피하라
잠 26:13~16
26: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26: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오늘은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다른 주제가 아닌 '영적 게으름'을 다루게 된 것은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 게으름을 고치고 주의 일에 더욱 열심을 품고 사는 자로 자신을 세우도록 기회를 삼았으면 하는 여망 때문으로 사순절 두번 째 주일 말씀으로 묵상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의 가난과 그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 게으름이 원인이 되어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게으름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게으름은 일시적인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그릇된 자기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릇된 자기 사랑은 자기 중심적인 일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목숨까지 겁니다. 이처럼 자기 사랑 때문에 세속적인 삶을 경계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망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게으름의 전형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영적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혹 영적 게으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수시로 살피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영적 게으름은 믿음의 여정을 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멀리해야 할 적 중에 적이며 원수 중에 원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말씀을 통하여 게으른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이런 게으른 사람을 피하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게으른 사람은 핑계가 많습니다.
본문 13절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자일수록 핑계가 많고 변명이 많습니다.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 몸은 게을러도 혀는 절대로 게으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몸을 게을리 움직이는 사람은 혀를 더욱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있는데, 잠 22:13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했습니다.
현대사회는 재택으로 하는 일들이 많지만 논경사회에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노동구조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게으른 사람은 자신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핑계와 변명거리를 찾습니다. "밖에 사자가 있고. 길거리에도 사자가 있다. 내가 나가면 사자에 의해 찢겨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 실재로 존재하지도 않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처럼 길로 나가지 않는 것에 대해 온갖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게으른 사람일수록 주위의 탓을 합니다. 핑계와 변명과 걱정만 많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게으름에 빠지지 않으려면 공연한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어쩌다가 한두 번 실제로 사자가 어떤 마을까지 내려오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렇다고 매번 내려오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마을에 내려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은 이 같은 사자를 핑계 대면서 좀처럼 집밖에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연한 핑계거리를 만들고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연한 핑계거리와 변명거리를 만들지 말고 부지런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게으른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본문 14절에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했습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따라 하루종일, 일년 내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합니다. 그 곳에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닳아서 없어질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전진이 없습니다. 나아감이 없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게으른자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게으른자는 침상에 맴돌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변화를 싫어하면 안됩니다. 변화를 싫어하게 되면 영적인 나태와 안일함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변화에 앞장서고 변화에 적극적인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게으른 사람은 차려준 밥상도 마다합니다.
본문 15절에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했습니다.
진수성찬을 차려주어도 손을 올려 입으로 가져가기가 싫어서 굶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떠먹여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려주신 밥상과도 같습니다. 게으른 자는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멀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마다합니까?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밥상을 적극적, 능동적으로 선용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을 이끌고 가셔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다시 부탁하고 그러나 제자들은 제사 잠들고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선용하셔야 합니다.
4, 게으른 자는 자신을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래서 고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본문 16절에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했습니다.
게으른 자의 특징은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주장이 훌륭하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니라 일곱명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다 틀렸고, 자기의 생각만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니 한 사람의 생각은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제시하는 사람의 수는 완전 수인 일곱입니다. 일곱사람이 다 틀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게으른 사람은 그 생각이 닫혀 있어서 더 이상 배우고자 하지 아니하며 다른이의 애정어린 권고를 무시합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누구보다도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다만 육신의 일에 게으른 것에 국한시키지 말고 영적인 교훈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육간에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롬12:11절 말씀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후 3: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영적으로 게으른 자의 특성은 우리가 싸워야할 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지런히 게으른 자아를 마음에서 몰아내는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예사람, 옛 성품에 지배를 당합니다. 그냥 육신대로 살게 됩니다. 이런 영적이 싸움이 없이 살면 점점 영혼은 기력을 잃게 되고 죽어가게 됩니다. 언제나 그래야 하겠지만 더욱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영적 게으름과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승패, 영적 능력과 무능의 갈림길이 바로 영적 게으름과의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