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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할줄 아는 사람(스 9:5-7)

유앙겔리온 2025. 5. 29. 12:30

부끄러워 할줄 아는 사람
스 9:5-7

스9: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스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9: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공자의 일화 가운데,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섶에서 대변을 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그 사람을 잡아오게 해서 꾸짖었습니다.

  "사람이 개나, 소, 까마귀 같은 짐승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가리고 못 가릴 것을 구별하지 못하느냐. 너는 사람이냐 짐승이냐?" 

  이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서 대변을 보는 사람을 목격했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저 놈을 피해 가자"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리둥절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길 가운데 대변을 보는 놈은 왜 피해 갑니까? 저 놈은 지난 번에 길섶에서 대변을 본 사람보다 더 나쁜 놈이 아닙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저 자는 양심도 없기 때문이다. 길섶에 저지른 자는 자기 행동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니 가르칠 수 있지만, 아예 길 가운데서 대변을 보는 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자이니,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끄러워 할줄 아는 사람은 가르칠 수도 있고, 법으로 다스릴수도 있겠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가르칠 수도 없고, 아무리 가혹한 법으로 다스릴지라도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도는 그 사람의 도덕적, 영적 수준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부끄러움을 예민하게 느낄수록 도덕적, 영적 수준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강도가 약하면 약할수록 도덕적, 영적 수준은 낮은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부끄러움은 인간이면 꼭 가져야 할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덕목이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끄러움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뜨겁게 달구는 일들도 하지 않게 되고, 부끄러움 때문에 회피하고 싶은 일들일지라도 억지로라도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나마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가 지탱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그 어떤 폭력보다 더 아프게 느끼고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신 본문말씀을 통해서 가증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할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이 행한 일도 아니건만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에스라를 세워주셔서 부끄러움을 아는 백성들이 되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인의 명예가 손상되는 일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진정 커다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못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불행입니다. 

  욥은 욥기 19:3절에서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라고 그의 친구들에게 서운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렘 6:15절과 8:12절에서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를 때 망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로 가득했을 때 멸망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청구서가 되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부끄러워 할줄 아는 사람이 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어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에 부끄러워했습니다. 가인마저도 하나님께서 죄를 밝히시니 부끄러워했습니다. 밧세바를 취한 다윗도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에스라 역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은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고 시위했습니다. 참 인생을 쉽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가 부끄러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마무리 하시며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은 싫으니까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기에 악한 마귀 사단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악한 마귀 사단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취하고 중독되게하고 마비시켜 죄악의 도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도록 합니다. 이것이 악한 마귀사단의 세상정복의 계략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 사단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의 수모와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워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도 부끄러움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면 심판 당할 때에 심판을 받을 것이 많아집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서 부끄러움을 피하고 부끄러움을 회개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