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인의 교회처럼(살전 1:1~5)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처럼
살전 1:1~5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3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주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데살로가인의 교회처럼"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의 어떤 것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였고 어떤 것을 기억하면서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 중에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1. 데살로가인의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은 믿는 성도의 가장 귀한 자본이고 자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고 히11:6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런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풍성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믿음이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히 11:1절 말씀과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여기 "역사"라는 헬라말 '엘곤'은 '행위,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그 누구에게도 행동을 일구어내고,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믿음은 반드시 건강한 행위와 좋은행동이 따릅니다. 활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 하고 실제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2.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은 수고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적인 수고가 따릅니다. 3절 '사랑의 수고와'라고 했습니다. 여기 '수고'란 헬라말 '코포스'는 '자른다', '몸을 채찍으로 때린다', '애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반드시 손과 발이 동원된 노동을 통한 수고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특성은 수고와 희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운 섬김과 봉사가 동반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수고하는 사랑,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점이었습니다. 머리로만 하는 사랑, 입으로만 하는 사랑,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수고가 포함된 사랑의 본을 그들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란게 사랑은 하는데 수고가 없습니다. 사랑을 하되 계산적으로 합니다. 이기주의적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몸 버려 피 흘리시고 십자가에 친히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3.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는 "소망 중에 인내"가 있었습니다.
환난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환난없는 교회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다 환난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이 많아도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기초가 든든한 영생의 소망이 있으므로 인해서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여기 사용된 "인내"의 헬라말은 '휘포모네'입니다. 이 말은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힘이 없어서, 다른 대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휘포모네'의 인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인내는 불운을 만났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열심히 일하는 상태로서의 인내였습니다. 슬픔을 만났을 때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흐는 눈물을 닦으며 씨를 뿌리러 일터로 나가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인내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다실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릴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소망을 갖는 것이 교회다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인내와 소망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을 때에 어려움을 참아냅니다. 우리는 천국이 소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달려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어려움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어려움은 더 큰 축복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인내를 할 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가 있고 인내의 가치가 있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핍박도, 환난도, 궁핍도, 고난도, 역경도, 참아야 합니까? 이는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상주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에게는 가을의 추수하는 소망이 있기에 찬 서리 내리는 봄부터 여름내 땀흘려 농사짓고 인내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장차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이루는 소망을 가지고 밤잠 못 자면서 공부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소망이 크면 인내도 커야합니다.
고전13;13절 말씀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제목이며 신앙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이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말로만이 아닌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확신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성령의 확신이 있기에 데살로니가교회에 이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 한광교회와 우리 성도들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와 성도로 기억되는 교회와 성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