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사모하지 말라(욥 36:20)
밤을 사모하지 말라
욥 36:20
욥36:20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인생은 무엇인가를 사모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며 사모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참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사모하는 것이 없이 사는 것은 젖먹이 아이가 젖을 빨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에 놓인 것이며 그래서 사모함이 없는 인생은 참 불행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 인생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전3:11)기 때문입니다. 사모함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무엇인가 사모하지 않으면 허전하고 허무하여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모함이 없으면 만족함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사는 사람은 사모해야 할 것을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모해서는 안 될 것을 사모하며 헛된 것을 사모합니다. 헛된 것을 소망하고 헛된 것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쏟으며 살게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더욱이 인생이 고난에 직면할 때 더욱 그 사모하며 사는 모습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람 종족 부스사람 바라겔의 아들인 엘리후라는 사람'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밤을 사모하고 밤의 일을 도모하는 것으로는 인생문제를 해결하거나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이 못된다는 것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모하다'는 말에는 '솨아프'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는 "열심히 ‘흡입하다’; ‘탐하다’; (몹시)원하다, 게걸스럽게 먹다, 서두르다, 헐떡거리다, 갈망하다, 코로 들이쉬다, 삼키다" 등과 같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사모하다'는 말은 이처럼 간절함과 절심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모하는 영혼만이, 그 사모함에 이르게 되고 누리게 되고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모 할 때 사모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사모함과 절실함이 '밤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했습니다. 이 말씀이 욥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습니까? 욥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 모든 인생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 '밤'은 '라일'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 단어는 "빛의 빗나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밤이 무엇이냐? 곧 빛이 빗나감, 그것이 밤이라는 것입니다.
이 밤은 영적으로 인생의 고난과 죄와 악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상황으로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인생의 시험과 고난을 받았던 욥의 이야기를 보면 유난히 밤이란 표현이 많습니다.
성경 전체에 '밤'이란 표현이 모두 287번 기록하고 있는데 욥기에만 24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밤을 사모하는 자들"은 대부분 악을 도모하는 자들이며, 악을 즐기는 자들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밤은?타락한?인간에게는?죄악의?기회이며 죄악의 시간입니다.?
밤은 성경에서 어두운 역사를?구체적으로?드러내는?시간이며,?어둠에?붙잡히지?않도록?조심해야 할 시간입니다. 밤은 어둠 가운데 자기 자신을 숨기기에 안성마춤의 시간입니다. 밤은 낮에는 칙칙한 회색의 색깔을 띠었다가도 밤이 되면 오색찬란한 불빛 문화로 바뀝니다. 낮과 빛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라면 밤과 어둠은 세상의 문화인 것입니다. 밤과 어둠은 죄인들의 본성에 더 잘 어울리는 옷입니다. 죄는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사랑합니다. 악인들은 어둠을 택하고 어둠 가운데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왜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여기서 사용한 이 '밤'은 욥이 사모하고 있다고 생각한 '죽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지는 아니했지만 그가 자신의 난 날을 저주하고 죽음을 사모하며 동경하는 듯한 표현들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든 욥이 밤을 사모했던 인물이었든지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3자가 느낄 때, 욥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과는 상관없이 고난을 피한 죽음은 안식이 아니라 심판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코 사모해야 할 것이 못된 것입니다.
환란중에 있을지라도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지라도 빛의 빗나감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빛을 사모해야 하고 진리를 사모해야 하고 주의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기도를 사모하고 찬양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그냥 일반적인 밤이라고 할지라도 밤은 모든 것을 잊고 조용히 잠이나 자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해결책이 아니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이럴 때, 밤을 사모함으로 말미암아 빛에서 빗나가고 맙니다. 밤의 일을 가까이 하고 어둠을 좇아가 선한 길이 아닌 악한 길을 도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밤을 맞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고 근신할 것을 말씀합니다.
밤을?사모하는?건?세상이며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밤은 분위기?있게?달콤하게?유혹하며?찾아옵니다. 그러나 밤을 사모하고 밤에 속한 일을 즐기다보면 그 어두움의 덫에 걸리게 되고, 밤의 종이 되며 세상의?종이 되고 맙니다. 망하는 사람은 밤에 망하고 살려는 사람은 밤에게서 탈출해야 합니다. 애굽의 밤에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하여 구원을 얻은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불신앙의 사람들이 밤을 죄짓는 때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욥이 그런 밤을 갈망하거나 사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흐르지만, 성경의 시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흐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성경은 하루의 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녁은 그렇게 칙칙하고 어두캄캄하다가도 아침이 되면 찬란한 빛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 인생, 하나님 나라는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항구로 향해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항구로의 항해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항상 아침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침을 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래야 합니다.
신정이든지 구정이든지 우리가 삼가 축하하고 복을 빌고 귀중히 여기는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밤을 사모하며 파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캄캄한 밤과 같은 것을 경험할 때도 찬란히 빚날 아침을 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밤을 사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빛으로부터 빗나간 어두움의 일을 하는 가운데서 끌려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을 사모하는 대신 낮을 사모하고 인생과 세상을 사모하는 대신 주와 복음을 사모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