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생각하는 사람(느 5:6~9)
깊이 생각하는 사람(contemplator)
느 5:6~9
느5: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느5: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5: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5: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프랑스 조각가 로뎅하면 그의 불후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작품은 그의 인생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의 삶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어린시절 총명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국립미술학교 입학시험에 3번씩이나 낙방을 했습니다. 어떻든 예술가가 되어서 겨우 먹고 살기 위해서 허드렛일과 같은 일에 메달렸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동료 중에 한 사람이 "여보게 눈에 보이는 것만 만들지 말고 내면의 것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이 말을 듣고 나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먹고 살기 위해서 보이는 것에만 몰두 하며 살아왔던 자신이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로뎅은 육안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서 많은 값을 받는 것을 목적 삼지 않고 진정한 예술가의 안목으로 내면을 생각하며 사물을 바라보면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40세가 되어서 마침내 불후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을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사물을 봅니다. 누구나 사건을 만납니다. 누구나에게 상황은 주어집니다. 그러나 누구나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야 달라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옅은 생각, 땅에 생각이 많아지면 오히려 번민하기 쉽습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번민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성찰'을 의미합니다.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위엣 것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이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삶과 사건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어 '감사'의 어원이 '생각'이라고 합니다. 깊이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되고 글이라고 다 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느헤미야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라 했습니다.
유다 사회에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것"은 아주 배은망덕한 일이며 가증한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처럼 취급당합니다. 종되었던 경험을 가진 히브리 백성들, 이들이 유다백성들이며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압제받고 종되었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유다인의 근본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북극에 동토의 땅인 툰드라가 있는데 북극 툰드라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네네츠족의 인생은 순록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고, 여름에는 하루에 길게 매일 35km정도를 유목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엔 "툰드라의 법"이란게 있습니다.
툰드라 사람들이 사는 집을 "촘"이라고 하는데 이 툰드라 사람들이 툰드라의 촘에 찾아들어오는 이들에게 3일동안은 거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먹어주고 재워주고 돌보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기면 그 사람은 툰두라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툰두라 사람으로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험한 동토의 땅에서 유목민으로 서로가 생존하며 살아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종된 삶과 출애굽하여 광야생활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같은 경험을 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형제자매들에게 압제를 행한 것입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러한 소식을 듣고 마음에 크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분노의 휩싸인 그 짧은 생각에는 모든 것을 불지르고 끝내내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분노에 의하면 어떻게라도 화풀이를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크게 노했을 때, 그는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충동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충동적으로 말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함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모릅니다. 그는 경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역할이 큰 자 일수록, 은혜받은 자 일술록 경솔한 사람이 되면 그 폐혜가 크고 무섭습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이며,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며, 세상을 중보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성문에 세워진 파수꾼들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사명,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깊이 생각하는 동안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 분노에 쌓여서 움직이는 몸짓과 손짓 하나가 문제를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 키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깊이 생각하며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 일을 수습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탁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위엣 것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에 생각, 예수의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의해서 분노가 누그러뜨려지고, 해롭게 하는 사람에서 이롭게 하는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위엣 것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언행심사가 달라집니다.
느헤미야의 깊이 생각함을 통하여 유다인들이 다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게 되었고, 느헤미야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면 사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한 결말을 보이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오늘 느헤미야에게서 깊이 생각한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