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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기를 더디하는 자(잠 16:32)

유앙겔리온 2022. 7. 29. 22:16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잠 16:32
찬 85, 405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욱'하고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분노범죄가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사회의 실상입니다. 사소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끔찍한 범죄로 귀결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그만큼 심각한 상황에 놓였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신의 이익 침해에만 발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당하는 이익 침해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견디질 못합니다. 많이 똑똑해져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랑이 없어진 까닭이며 자신이 항상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분노에서 예외일까요? 그렇다면 좋겠습니다.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분노범죄의 위험성에 취약한 것은 불신앙하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고, 그 분노를 방치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분노범죄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분노범죄의 주체가 되어서도 안되고 피해자가 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습하고 무더운 날씨와 후퇴하는 경제로 인하여 삶의 불안정에 흔들리는 이 시기에는 더욱 분노가 많아질 때이기 때문에 분노가 범죄로까지 가지 않도록 분노관리가 더욱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잠27:3~4에서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솔로몬 성전과 솔로몬 궁을 건축한 건축의 대가였습니다. 그가 건축하면서 많은 건축 재료들을 다루어 보았는데 그 중에 무거워서 무서운 것 둘이 있는데 그것은 흔해빠진 "돌과 모래"라는 것입니다. 

  돌과 모래는 건축재료 중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고 값싼 재료입니다. 그러나 돌과 모래를 사용하면서 그 돌과 모래가 얼마나 무거운 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게 때문에 노동자들이 깔려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여 잘 다루지 않으면 안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합한 것 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미련한 자의 분노라"했습니다. 분노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돌과 모래도 무거운데 그 둘을 합한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분노라서 인생을 건축해 가는 과정에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만 사고를 면할 수 있고 불행을 피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킬 뿐입니다. 분노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의심을 키우며, 편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분노는 내 마음 속의 호랑이입니다. 언제 마음의 울타리를 부수고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분노라는 내 마음속의 호랑이가 일단 울타리를 부수고 나오면 스스로 가슴을 치며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누구나 분노 조절의 고삐가 풀리는 순간 대부분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분노는 '반복되고 전염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분노는 다스려야 할 부정적인 성품인 것입니다. 

    분노란 남의 언행에 대해 우리 각자가 선택한 감정적 반응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분노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단초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에 달렸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라 하십니까? 분노는 어떻게 처리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분노가 생기는 것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분노를 전혀 하지 말라. 하지 아니하시고 "분노를 더디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분노가 호랑이라면 우리에서 튀어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고, 혹 우리에서 뛰쳐나왔다면 일단 달래서 다시 우리 안에 무사히 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 백성들을 향하여 "노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분노를 더디하는 사람은 "명철한 자, 시비를 그치게 한다.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사람의 슬기"라는 말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성급하게 내는 자를 향하여서는 "마련한 자,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다툼을 일으킨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네카라는 사람은 “분노를 지연시키는 것이 분노에 대한 최선의 묘약이다”라고 했습니다. 분노는 뒤로 미룰수록 좋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본다면, 분노의 무서움은 성급성과 조급함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속도를 제어하는 장치가 망가져버린다는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분노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이 가르치실 틈도 없이 혀의 말이 나가고 손과 발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속도 제어장치가 풀리고 망가져버리면 나를 도우려는 일도 그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해석하게 되고, 나를 해하는 일로 받아들여서 분노의 낫을 휘두를 수도 있습니다. 속히 분노 성급하게 내게 될 때에는 내가 틀렸을 가능성, 내가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쳐 할 수 없게 됩니다. 
 
  옛 우리 조상들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면서 서로 양보하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지녀왔고, 선비들은 비가와도 뛰지 않는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매사에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무슨 일만 생기면 서로 ‘탓’하며 성급하게 분노하고 언성을 높여 싸우기 일쑤입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라고 하는 겸허한 자세로 분을 자제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어난 분노를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분노의 댐을 만들고 그 댐 안에 분노를 가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댐이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큰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시고 기름부어주셔야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지 않고서는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성냄과 분노는 내 중심, 내가 주인, 임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 중심이시며 내 주인되심으로 우리의 삶의 목표가 옮겨가지 아니하면 참으로 고쳐지기 어려운 성품입니다.  

  분노의 감정으로 서들러  직행해버리는 사람들은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쉽습니다.   

  반대로 분노의 감정이 생길 때면 잠시 마음의 감정을 가다듬고 상황정리를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단초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이 중심이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