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35)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2~35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안도현이라는 시인의 시 중에 ‘너에게 묻는다’는 시가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 인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는 1994년 안도현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발표한 시로, 총 3행에 불과한 짧은 시행 속에서 현대인들의 차가운 삶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그런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는 연탄재는,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시인이 이 시를 쓸 때에는 자고 깨면 일상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이 연탄재였을 것으로생각됩니다. 연탄재는 연탄이 활활 타오르고 남은 찌꺼기입니다. 그러나 연탄재가 되기 전 연탄은 누군가의 추운 겨울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활활 타오르던 존재였습니다. 시인은 이런 연탄의 속성에서 열정과 사랑을 발견했으며, 남을 위한 배려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흔적인 연탄재를 함부로 하지말라면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물음에 우리는 무슨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글로바라 하는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채로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정도되는 엠마오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로 올라갔을 때는 아마도 불붙는 마음에서 였지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어둠의 권세에 사롭잡힌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목박아 죽임으로 말미암서 당시에 시민들과 제자들의 마음에 심고자한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었고 차가운 마음이었습니다. 모두의 입을 봉하고 다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같은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마음, 세상이 가져다주는 마음은 두려운 마음입니다. 정내미가 떨어지도록 싸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시간도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의 영적온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골몰해있는 영적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사람은 서로 예루살렘에서 며칠 사이에 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낙담스럽게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자연스럽게 그 둘 사이에 끼여 들어와서 보조를 맞추며 동행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길위에서 만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성경을 풀어주셨고, 풀어주신 성경을 들을 때에 두 제자의 마음이 연탄불처럼 뜨거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경풀이는 두 제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볼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두 제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마음이 뜨거워진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낙심하여 도망치듯 떠났던 그 피의 현장, 주님의 고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방금 막 엠마오에 도착했고 그 때가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망서릴수도 있고, 핑계할 수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채면도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구애됨이 없이 왔던 길을 되돌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질 때,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삶을 바꾸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뜨거워져야 우리의 삶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몸이 가벼워져야 달리기 쉽고 뛰기도 쉽고 날아오르기도 쉽습니다.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피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좀더 뜨거운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뜨겁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은 누구보다도 강력한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35절)했습니다. 드디어 닫혀있던 그들의 입이 활짝 열렸고 말문이 터졌습니다.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언했습니다.
마음의 뜨거움은 두려움에 떠는 자들을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이미 무서워 떠는 겁쟁이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은 체온을 떨어뜨리고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고 영적온도를 떨어뜨립니다. 이렇게해서 마음이 차가우면 우리는 교만해지고 완악해집니다.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합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남을 비판하게 되고 정죄하게 됩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고 모함하기를 즐겨합니다.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온도가 떨어지고 영의 온도가 떨어지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버리고 어둠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인지 반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뜨거워야 하고, 기도로 뜨거워야 하고, 성령으로 뜨거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으로 불을 붙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가슴이 뛰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이것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에너지입니다. 이 에너지가 내 안에서 움직일 때, 내가 주를 위해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불붙는 마음일 것입니다. ?
금주 한주간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